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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Sep 05. 2018

그놈의 죽음

9월의 이야기 둘

“죽음의 좋은 점엔 뭐가 있을까?”

스승의 날이면 유일하게 찾아가는 나의 선생님은 19살 내게 저렇게 물었다. 대입 논술을 대비한 일종의 철학 수업이었다. 죽음의 좋은 점이라니.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몇 가지 답을 주셨다. 가물가물해도 그중 하나는 선명하다. 인간의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 생이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걸지 모른다, 만약 영원히 산다면 늘어져 있지 않겠나, 그런 이야기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당시 꾀나 ‘오호’ 싶었나 보다.     


요 며칠 ‘죽음의 좋은 점’ 이야기가 계속 맴돌았다. 험상궂다 못해 험악한 사회에서 내 자리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자소서를 쓰고, 시험을 보러 다니는 데 자꾸 죽음의 그림자가 보여서 그렇다. 내가 죽겠단 게 아니라, 자꾸 죽음을 묻는다. 작년 이맘때는 3분 뒤 핵폭탄이 떨어진다면 뭘 할 거냐고 묻더니, 한 달 전엔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라고 했다. 오늘은 본인의 부음 기사까지 써야 했다. 이쯤 되니 왜 갑자기 죽음 바람이 부는 건가 싶었다.      


19살이나 지금이나 죽음은 멀리하고 싶은 걸까. 엉망으로 써낸 답도 있고, 어찌어찌 힘겹게 써낸 답도 있었다. 나의 끝은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렇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걸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창의력이 부족한 걸 수도 있다. 뭐 어찌 됐든 세 번이나 물어보니까 19살 때 그 간추린 철학 수업이 떠올랐다. 회사원들은 가슴속에 사표 하나쯤 품고 원동력 삼아 일을 한다고 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싶다. 지금 삶이 조금 벅차도, 언젠가 필연으로 다가올 죽음을 생각해보라고, 그리하여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힘을 내보란 뭐 그런 메시지인가.     


그런데 생각할수록 어딘가 불쾌하다. ‘노오력’의 또 다른 버전 같은 기분이다. 다 맞는 말이긴 하다. 훗날 죽음을 생각해보면, 일상이 소중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19살의 내가 ‘죽음’에 별생각 없이 자라온 것과 다르게, 요즘 아이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월요일마다 나의 19살 과외학생은 그들의 세계를 들려준다. 문자 그대로 죽음의 그림자가 구석에 자리 잡았다. 자해를 하고, 우울증 약을 먹고, 지난주엔 수면제를 먹고 실려 간 아이도 있었다. 언제나 ‘문제아’로 일컬어지는 학생은 있어왔다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자퇴는 일상이요, ‘자퇴하지 않고 버틴 아이’가 다수가 된 수준이다.      


비단 고등학생뿐일까. 내 또래도, 내 주변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15년 동안 부동의 OECD 자살률 1위를 지키고 있는 나란데 오죽할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늘 떠올리며 산다는 거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죽음의 좋은 점’을 한 번 생각해봐! 우린 유한한 생을 누린다니까. 주변에 있는 작은 행복을 떠올려보자! 라고, 세상이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이 불쾌함이 명확하게 풀리진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냥 내가 자소서를 붙잡고 있는데 이골이 나서 그런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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