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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Sep 09. 2018

여행인 게 자랑

9월의 이야기 여섯

“그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벽지도 떨었다. 아버지의 훈계는 이어졌다. 너가 뭘 아냐, 뭐에 홀려서 갑자기 그러느냐, 흥분한 손가락이 흔들렸다. 하지만 16살 아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 눈에 나는 답답한 놈이었을 것이다. 학원을 다 끊고 알아서 자기가 공부한다니, 그것도 아무도 없는 독서실 골방에서? 그가 종용한 선택지는 역시 학원이었다. 부딪혀봐야 세계를 안다고, 학원에 다녀 ‘잘난 놈’들과 함께 생활해야지. 공부도 잘하고 잘난 사람이 된다고 아버지는 믿었다.


하지만 독학 선언은 갑작스러운 충동이 아니었다. 치열한 자기 회의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학원의 수업 방식은 나와 맞지 않았고, 그 곳의 모범생들은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집안의 그 불안한 공기를 애써 무시하고 나는 독서실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가까스로 아버지를 이기고 나니 또 다른 허들이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의 걱정, 학원의 만류, 친구들의 피식거림까지. 들어보면 결국 왜 좋은 길 놔두고 험한 길 가냐, 어른들 말씀 틀린 거 없다, 너의 꿈을 펼치려면 그만큼 넓게 봐야 한다... 그런 얘기 속에서 마치 레일에서 탈선한 롤러코스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답답했다. 더욱 더 독서실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7곳’ ‘당신이 꼭 경험해야 할 보라카...’


얼마전 누군가 링크를 보내줬다. 이번 방학, 뭐하냐는 물음에 책 읽으며 쉰다고 했더니 내게 묻는다. “여행 안 가세요?” “저 여행 별로 안 좋아해요. 그냥 가끔...” 어색하게 웃어넘기는 표정이 못마땅했나보다. 현혹하듯 말을 잇는다. 그래도 견문을 넓히려면... 새로운 경험... 힐링과 리프레쉬...그 때 나는 16살 아들이 되어버렸다. 마치 레일에서 탈선한 롤러코스터가 된 기분.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는다. 물론 새로움을 좋아하고 즐긴다. 굳이 돈을 많이 써가면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어딜 가느냐보다 무슨 생각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주의다. 그런데 이런 내가 답답했는지 여행 관련 링크를 왕창 보내준 것이다.


여행을 즐기지 않으면 손해본 사람이 되는 시대다. 어학연수, 교환학생을 안 간 사람이 드물 정도고, 티비에는 여행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나온다. 여행 책도 아주 잘 팔린다. 여행 사진을 SNS에 올리면 주목을 더 받는다. 여행인 게 자랑이다. 나는 이 모습을 여행 권하는 사회라고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여행을 가야만 견문을 넓힐 수 있고 힐링이 되는 것일까. ‘여행은 좋다’라는 명제에는 ‘누구에게’라는 대상이 빠졌다. 여행을 향유할 주체에 대한 고민도 빠져있다. 모두가 다 같은 감정일리가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분명히 학원이 좋다’며 호통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사실 불안해서 그런 게 아닐까. 길을 다시 못 오를 수도 있다는 불안. 레일을 벗어나면 롤러코스터는 사고가 난다. 우리 앞에는 몇 가지 레일이 깔려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레일. 더 넓은 세계에서 더 좋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강박. 글로벌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여행을 떠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이렇게 사회가 정한 레일에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여행을 선택당하는 것은 아닐까.


넓은 세계를 알고 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 우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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