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균실 같은 일본 사회에서 우리의 '온기'를 되묻다
일본산촌 탐방 준비를 하다 유학 시절 적었던 글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젊은 날의 저는 일본의 식문화가 그저 낯설고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제목이 <젓가락이 두 벌인 나라>라고 적혀 있더군요.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변한 지금, 다시 그 글을 읽으니 단순한 식사 예절이 아닌 '사람 사이의 거리'가 보입니다.
이번에 떠나는 '일본 산촌 탐방'을 앞두고, 동행하는 분들께 작은 화두를 던져봅니다.
일본의 식탁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가끔 젓가락이 두 벌 놓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젓가락'과 공용 음식을 덜어오는 '토리바시(取り箸)'입니다.
철저하게 '내 것'과 '우리 것'의 경계를 나누는 그들의 문화입니다.
그들의 식탁 문화는 철저한 '개인'의 세계입니다.
집에서조차 생선을 구우면 각자의 접시에 한 토막씩 놓입니다.
가운데 놓인 요리는 어디까지나 '나눠 담을 대상'이지, 우리처럼 숟가락을 섞어가며 '같이 먹는 대상'이 아닙니다.
토리바시가 없을 땐 자기 젓가락을 거꾸로 뒤집어쓰는 '사카사바시'를 하기도 합니다.
유학 초기, 저는 그 냉정한 구분이 낯설어 아예 "젓가락 하나 더 주세요"라고 청해 가운데에 놓곤 했습니다.
그들의 식탁은 위생적이고 합리적이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메이와쿠) 배려가 스며 있습니다.
철저한 '개인(Individual)'의 완성이지요.
반면 우리의 옛 식탁은 어땠습니까.
펄펄 끓는 찌개 뚝배기에 온 가족이 숟가락을 부딪치며 '합전'을 벌였습니다.
위생의 잣대로 보면 질색할지 모르나, 그 안에는 "우리는 식구(食口)"라는 뜨거운 연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누룽지를 씹어 부드럽게 만들어 먹여주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비위생적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며느리가 기겁을 하며 아이를 데려간다는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제 글은 일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지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한국 사회는 일본보다 더 빠르게 개인화되고 있습니다. 식탁은 조용해졌고, 관계는 멸균실처럼 위생적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의 마음은 더 따뜻해졌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위생과 자유는 얻었으되, 그 투박했던 시절의 '정(情)'과 '온기'는 어디에 가 있나?
저는 지난 25년간, 5년은 현지에서 가족과 살며, 이후 수십 년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그 변화의 궤적을 지켜봤습니다.
라멘 한 그릇, 초밥 한 점에도 그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번 탐방은 단순히 그들을 관광하거나 답을 베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철저한 개인주의와 합리성이 농촌 소멸의 위기 앞에서 어떤 한계에 부딪혔는지, 혹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냉정하게 관찰하러 가는 길입니다.
여행은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생각의 자리를 옮기는 일이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타산지석'을 통해, 우리 농촌이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바뀌어버린 시대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우리의 답'은 무엇인지 다듬고 돌아오겠습니다.
현지에 가면 라멘도, 초밥도, 우동도 오직 젓가락만으로 먹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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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 일본을 베끼면 반드시 실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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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2월, 또 다른 '실험의 무대'로 떠납니다 (B코스)
이 연재는 하나의 생각 실험입니다.
그리고 2월, 그 생각을 현실에 대입해 보는 B코스 일본 산촌 현장 탐방이 이어집니다.
A코스와 같은 질문을 품고 떠나되,
지역과 방문처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갑니다.
다른 조건, 다른 실패, 다른 가능성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묻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어떻게 시골에서 존엄하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싶은 분들을 위해
B코스 탐방단을 모집합니다.
1월 7일까지 '채상헌 교수의 브런치'에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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