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하려면 예상하지 말아야지

불안함으로 뛰어들기

by 기민

한동안 열심히 일만 했다. 한 가지 일에 쉼이 생기면 다른 일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체력은 떨어져 가고 마음은 ’과녁 없는 삐침‘ 상태가 된 지 오래.

나도 나 하고 싶은 거 하게 해달라고, 나도 좀 쉬게 해달라고 마음이 내게 섭섭해하는데, 문제는 그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발산된다는 것이다.

성격이 더 괴팍해지기 전에 뭔가를 해야 했지만, 무얼 해야 마음을 달랠 수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던 와중 주어진 이틀의 시간.


‘이럴 땐 여행이지.’


하고 떠오른 말은 누구의 생각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일까, 문화에 학습된 에고의 외침일까.

공허하게 긍정하고서는 춘천으로 출발했다. 숙소도 예약했고, 날씨도 좋았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신이 나도 부족할 여행에 ‘괜히’라는 말이 떠올랐다.


혼자서 여행 가서 뭐 하지, 날은 더운데 뭘 보러 걸어 다니지, 뭘 보고 싶은지를 모르는데 어딜 가야 하는 거지.

당연히 내가 신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온 여자친구에게, 보고 싶은 게 없는데 캠핑을 가야 했나 봐 괜한 심술을 부린다.


캠핑을 갔어도 비슷한 마음 아니었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운전하면서 즐겨 듣는 ‘취미는 과학’이라는 콘텐츠에서 세상은 왜 불공평한가에 대한 주제가 한창이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출신과 환경이라는 말에 덧붙여,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의 세포가 분열하기 시작해서 어떤 세포는 심장의 조각이 되고, 피부 조직이 되고, 뇌세포가 된다며

어느 곳에 배치(?) 받느냐에 따라 하루 밖에 못살거나 평생에 걸쳐 사는 세포가 된다고.

그 차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면에 가까운 곳에서 분열된 세포이냐 아니냐로 갈리게 된다고. 말하자면 우연이다.

우리는 좋은 우연을 운이라고 한다. 그리고 운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반복’하는 일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행위에서 우리는 운을 맞이할 확률이 높아진다. 예기치 못한 일을 만나기 위해 자주 여행한다..?


계획해서 미리 알고 가는 것은 답사며 관광으로 느껴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은 말 그대로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떨어진다.

참 괴팍한 욕심이지.



불공평의 첫 번째는 출신이며, 두 번째는 환경이란다. 줄기세포를 단단한 곳에 놓아두면, 자신도 주변과 같은 조직이 된다는 것이다.

뼈가 보강되어야 하는 곳에 줄기세포를 놓으면 뼈가 된다. 피부에 놓으면 피부가 된다.


아. 예기치 못한 일을 겪으려면 예기치 못한 곳으로 가야 하는구나.


나는 내비게이션을 종료했다. 눈앞에 보이는 곳에 갔고,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을 때 고민 않고 그냥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갔던 게스트하우스는 저녁을 그날 투숙객들과 함께 먹는다. 평일이었으니 내가 묵을 도미토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저녁 시간에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사장님과 나와 나보다 조금 어린 남자분이었다.

시커먼 남자 셋이서 밥을 먹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급기야 밤 11시에 버너와 라면, 소주를 챙겼다.

사장님만 알고 있다는 숨겨진 스폿으로.


춘천의 밤은 아직 봄의 흔적이 남은 듯 바람이 시원해서, 수영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으나 우린 이미 너무 들떠있었다.

시커먼 밤과 작지만 분명하게 빛나는 별들, 풀벌레 소리와 물소리.

암흑의 물속은 마치 우주에 몸을 맡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잠에 들었다.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기치 못한 일을 겪지 못하면 어쩌나,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성공적이었다.

언제 이렇게 겁이 많아졌을까. 스스로 예기치 못한 순간이 좋다면서, 성공 확률을 계산하고 있으니 움직일 수가 있나.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나를 만든다.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거기에 걸맞은 나의 정체성이 부여된다.

여러 정체성은 마치 항체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다. 삶에 예방 접종은 없으니 매번 감기에 걸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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