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만드는 기품
나는 다도를 2년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있다.
1년은 평생교육원에서, 또 1년은 유명하신 모선생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하지만 너무 형식에 얽매인 다도를 하다보니 오히려 차를 멀리하게 되는 나자신을 보고 “그저 차나 즐기자”는 마음으로 공부를 멈추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혈기왕성하고 규율에 얽매이는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차를 사랑하는 다인이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탓에
격식을 차려서 차를 마시기 보다는 차맛을 음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그 맛을 음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도를 하는 공간은 거의가 작고 조용하다.
작은 공간에서는 미세한 움직임과 작은 소리가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물이 끓는 주전자의 미세한 소리와 김이 오르기 직전의 정적.
그 사이에 마음이 먼저 가라 앉는다.
조용히 앉아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명상이 된다.
물이 끓기를 기다려야 하고,
뜨거운 물을 식힘 그릇에 부어 여린 찻잎을 우려 내기에 적당한 온도로 식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
햇차를 맛있게 우려내기 위해서는 60~65도C쯤으로 식힌 물을 다관에 부어
다시 2분 가량을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른다.
차를 따를 때는 너무 급하거나 느리지 않도록 고르게 따르며 잔을 오가며 세 번에 걸쳐 양을 조절한다.
차를 우리는 손놀림은 느리다.
찻잔을 놓고, 물을 붓는 높이, 잔을 돌리는 방향까지,
모든 동작에는 이유가 있다.
한 잔의 차를 마시기 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차의 맛을 즐기기 전에 차를 달이는 분위기와 차를 마시는 정취가 더 중요한 것이다.
다도에서 느림은 미숙함이 아니다.
느림은 상대방에 대한 공경이고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마음이 급하면 손이 먼저 서두르고,
그 조급함은 고스란히 잔에 남는다
그것은 검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검도의 고수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하수들은 마음이 급하다.
상대방이 나를 먼저 공격할까봐 언제나 노심초사 중이다.
그러나 고수들은 상대의 공격을 기다릴줄 안다.
상대가 공격해 오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는다.
상대가 움직여야 빈틈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래서 검도의 고수들은 기품이 흐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품이 생기는 것이다.
바쁜 움직임 속에는 기품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은 기품이 있다.
옛날 선비들은 소나기가 쏟아져도 절대 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차 한 잔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는 집중,
과거와 미래를 잠시 내려 놓는 결단.
다도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시간에는 말이 줄어든다.
설명보다 경험이 앞서고,
판단보다 감각이 먼저 온다.
한 모금의 온기 속에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는다.
매번 같은 순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그 날의 다도는 결코 같지 않다.
날씨, 온도, 마음 상태에 따라 차 맛은 달라진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변화를 알아 차리기 위한 장치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잃기도 하고,
다시 발견하기 한다.
다도는 반복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세상은 속도를 요구한다.
더 빨리 판단하고, 더 빨리 반응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다도는 그 요구에 조용히 등을 돌린다.
충분히 느려질 때, 비로소 깊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품은 애써 붙잡는 것이 아니라
느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것이다.
천천히, 느리게 다도를 함으로써
몸 속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우아함과 깊이는 여전히 나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작은 소망하나, 다구만 갖추어진 조그만 방을 결국엔 갖게 되었다.
적당하게 식혀진 물을 다관에 부을 때면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작고 조용한 방안에서 가끔씩 차를 마시곤 한다.
매일 밤 12시에 깊은 산 속에서 받아온 감로수로 차를 달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은 한 달에 한 번, 작은 방에서 고요히 차를 마시는 걸로 만족한다.
언젠가 이 미천한 몸과 정신에도 차의 기품이 베이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