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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mm에 무너진 거대인간, 천국에 다녀오다

빈대 붙지 좀 마란 말이야

by Siho

말 그대로다. 빈대라니! 21세기에 빈대라니!!!!

몇 년 전부터 유럽을 강타한 베드 버그 열풍이 이젠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브렉시트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유럽이 아니라지만 영국 또한 수많은 유러피안이 들고 나는 곳. 안전할 수 없다.


신나는 에든버러 방문기 2025편! 을 적으려고 했는데 본인의 신변에 일어난 이 빈대 사건보다 심각한 사안일 순 없다. 열흘 전 이던가? 몇 주 만에 도서관에서 공부라는 걸 하고 나니 스스로 기특하다 싶어 (스스로에게 상을 줄 명분은 항상 생기는 편이다) 학교 근처 펍에서 친구와 IPA 맥주를 한 잔 하고 나온 참이었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25분을 가야 하는데 비가 이렇게나 심하게 올 줄이야.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으니 힘차게 페달을 내딛는다.


빠르게 달리는 만큼이나 두두두두두 안경으로 몰려드는 빗줄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거 위험한데.

하필이면 깜박하고 자전거에 다는 야간 등도 충전기에서 안 빼 온터라 오늘 같은 날은 사고 나기가 딱 좋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페달을 밟아 집에 도착했다. 덜덜덜 너무 떨은 나는 따순 물에 말끔히 씻고 소복이 잠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은 전개다. 그. 러. 나. 일은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면서부터 조짐을 보였다.

'아니 어깨가 왜 이렇게 간지럽지?? 가방을 너무 무겁게 멧나? 아... 어제 야외 펍에서 마시다 보니 모기를 많이 물렸나 보다. '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니 와우, 못해도 양 쪽 어깨에 3-4군데씩은 물린 것 같다. 엄청 간지럽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어깨만 딱 공략할 일인가? 내가 이 정도이면 나보다 어린 내 친구는 훨씬 더 물리지 않았으려나.


연락을 넣어본다.

"Anthony, 어제 잘 들어갔어? 나 어제 모기 엄청 물린 것 같아. 너는 괜찮아?"

내심 그도 어느 정도는 물렸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건 모기일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나의 불안함, 이 간지러움이 모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나의 '촉'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익숙한 이 감각.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 십자로 누를 수 없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 아... 안되는데.


띠딘~

앤서니에게서 답이 왔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안 물렸는데? 어제 뭐 물렸어?"


이런...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그럼. 내 어깨에 다다다 물린 이것은 모기일 수는 없다. 내가 자타공인 소문난 모기밥이긴 해도 나만 8방을 물릴 수가 있나. 어라? 그런데 간지러운 곳이 어깨만이 아니다?

가만 보니 허리도 간지럽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다시 확인하니 이런! 허리에 북두칠성이 생겨있었다.

절대 모기가 아님은 확실해졌다. 이건 빈대다. ㅠㅠ 이럴 수가... 또 빈대(베드 버그라고도 알려져 있다) 라니.

약 10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면서 극도로 약해진 면역상태에서 빈대에 엄청나게 물린 적이 있다. 발목의 물집이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탁구공’만큼 부풀어 올라, 걸음조차 불편했던 그 기억이 다시금 소환된다. 아, 안돼!


현장(?)을 확인하자 갑자기 모든 의욕이 사라지면서 짜증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자꾸 나만 이렇게 물리는 거야!!!! 자, 우선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제의 나의 동선을 다시 되짚어 봐야겠다.

우선 집에서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엘 왔고, 점심시간에 휴게실에 앉아서 밥을 먹고 나서는 도서관으로 향했었지. 휴게실에 앉은 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도서관에서 2-3시간 정도 앉아 있었으니 도서관 의자가 가장 유력하다. 이런 불결할 데가!!!!


여기 와서 민원 대장이 되어버린 나는 학교에 당장 항의메일을 보낸다. 위생에 가장 신경 써야 할 곳이 학교이고 도서관 아니냐면서. 분노의 타자를 마친 나는 이렇든 저렇든 이제 짐을 싸야 했다. 다음 날 새벽기차로 에든버러엘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시간으로 새벽 두 시, 한국 시간으로 오전 열 시에 한국과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어 눕는 둥 쉬는 둥 마는 둥 하며 너무나 간지러운 북두칠성을 (긁을 수도 없으니)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려가며 달랬다.


회의가 끝나고 에든버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나는 편안히 앉을 수 없었다. 버스며 기차의 패브릭 좌석이야 말로 베드버그의 온상이라고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내 돈 주고 앉아가는데 엉덩이며 등을 맘대로 편히 기댈 수도 없다니. 이건 절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세상 불편하게 세 시간을 달렸다. 옆에 사람이 앉아있는데 옷 섶을 올려 긁어댈 수도 없는 노릇, 어깨는 이미 너무 긁어 피가 날 지경이고. 잠도 못 자서 피곤할 대로 피곤한 상태. 이대로 에든버러로 가는 게 맞나 몇 번이고 고민했지만 이미 다 끊어둔 기차표며 숙박, 공연 티켓을 날리기는 쉽지 않았다.


(에든버러에서의 공연 관람기는 따로 다룰 것이니 싣지 않는다.) 물론 공연은 즐거웠지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시 간지러움과 싸워야 했다. 유명한 맥주집을 한번 가보려고 했지만 몸에 염증이 생긴 이상 술은 절대 입에 댈 수조차 없었다. 원래도 즐기지 않지만 못 먹게 되어버리니 더 심통이 났다. 나의 지피(챗 지피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지 문의를 했다. 지피는 근처의 약국이나 BOOTH(우리나라로 치면 올리브 영 같은, 화장품, 간단한 미용용품과 약을 취급하는 곳)에 가서 파머시 퍼스트라는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본디 약 처방이나 진단은 영국의 의료서비스인 NHS를 통해 GP라는 국영 병원? 에서 하지만 파머시 퍼스트 서비스를 이용하면 간단한 감기나 벌레 물림 등의 현상은 지역 약국이나 Booth에서도 해준다고 한다.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으라고 지피가 알려줬다.

그리고 Booth의 약사도 히스타민 어쩌고 하는 걸 보니 그 크림을 사서 바르란 이야기 인가보다.

이거 줄까? 하기에. 네. Anti히스타민 주세요. 해야 하는데 항 히스타민만 생각나서 "Yes, I'd like to have HANG histamine"이라고 해버렸다... 행 히스타민이라니. 어느 나라 말이야. 꼴에 영어라고 항도 아니고 행은 뭐지. 이건 정말 몇몇 사람에게만 웃길 이야기이다. 하하하.


그러나 저러나 약을 받아 들고 나왔다. 하필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이기 때문에 영국 비자 및 영국의 건강보험을 가입한 나에게는 파머시 퍼스트 서비스가 해당이 안 된다나. 결국 제값을 다 내고 샀다. 한숨.


자 이제 어디에 앉아서 이 약을 발라야 하지? 음식점? 염증을 일으킬 음식이나 술은 먹을 수도 없으니 펍은

안되고. 또 어디서 물릴게 걱정되니 공원에도 앉을 수 없고. 저으기 저 사람들처럼 덜렁 드러눕는 건 말도 안 되고. 앉을 수도, 간지러우니 가만히 서 있을 수도, 걸으면 옷이 스치니 걸을 수도.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조차 없으니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다. 이 비위생적인 영국 같으니! 이놈들아!


뒤지고 뒤져 천 의자가 아닌 차갑고 써늘한 스텐 의자가 놓인 카페를 찾았다. 엉덩이는 시리지만 벌레는 없겠지.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박힌 벌건 자국들에 크림을 칠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스스로가 처량해진다.

혐짤…그런데 정말 북두칠성 같지 않은가?

보기에만 그럴싸한 유학생활, 6mm도 안 되는 베드버그에나 물려, 잔디밭에서 한갓지게 일광욕도 못하고 차가운 스텐의자에서 안식을 구해야 하다니 ... 한숨이 푹푹이다. 아무래도 피부거죽이 두꺼운 유러피안에 비해 아시안은 결이 곱고 피부가 얇으니 상대적으로 이런 벌레 물림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듯. 억울하다! 이것이 K- 벌레 뜯김이다…


고로 난 이런 건 못한단 이야기다.

하필 다음 일정은 Royal Botanic Garden인데... 갑자기 풀이며 숲이며, 벌레가 가득할 곳으로 가는 게 몸서리쳐진다. 자연이 무서워진다. 나무의자에 앉아서 차 한잔 홀짝이는 게 나의 소박한 계획이었는데 나무의자??? 절레절레. 그냥 얌전하게 (빨리 걸으면 물린 곳이 열이 올라 간지러움이 심해지므로) 걸으며 감상해야겠다.


입구부터 잠깐 놀랐다. 네 영혼을 청소하고 들어오라니. 나의 음험하고 불만 가득한 마음을 읽기라도 하신 것일까? 아, Soul 이 아니라 Soles 구나. 깜짝이야. 병균이 옮거나 옮아갈까 봐 이렇게 물기가 가득한 패드가 입구에 놓여있다. 지금 내 몸뚱이가 병균 아닐까... ㅠㅠ


이 순간 만은 간지러움을 잊을 정도로 날씨가 맑아졌다. 아까까지 꾸름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내 앞에서 알콩 달콩 데이트하시는 노부부 (로 추정)를 보면서 나의 뾰족함도 조금씩 말랑말랑 해지고 있었다.



비 온 뒤 하늘. 유난히 내가 사랑하는 보라색 꽃들이 많아서 행복했다. 그리고...

해가 비추일 때와 아닐 때, 사뭇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왼쪽이 해가 잠시 구름에 가려졌을 때, 오른쪽이 다시 해가 고개를 내일었을 때다. 무언가 확연해 지는 존재들.


그렇게 굽이 굽이 햇살을 누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엄청난 화질의 풍경화가 펼쳐졌다.


나는 흡사 천국에 온 줄 알았다. 사진은 내가 느낀 현장의 1000만 분의 1도 담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깨끗하고, 맑고, 싱그러운 기운이라니!!! 아픈 곳마저 깨끗이 나을 것 같다. (제발!)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한껏 찡그리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천국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청설모의 사락사락 발자국 소리, 아주 간혹 사람들의 두런두런 이야기나 웃음소리뿐인 이곳이 진정 인간 세상인가 하고 자꾸만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어제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온몸을 벅벅 긁어대며 앉을 곳을 찾아 승냥이 처럼 헤매는 나를 보며 조금은 딱하셨는가.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이 내려주신 놀라운 선물이었다. 이런 곳이 천국이라면 더욱더 적극적으로 착하게 살아야겠다.


벌레에 물린 간지러움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살짝 약해진 정도일까. 꾸준히 약을 먹고 바르며 견뎌내 보아야겠지. 몸에서 열이 나면 다시 간지러워지는 탓에 스쾃도 못 하고, 여기저기 물린 상처가 스스로 징그러워 수영장도 못 가고 그냥 최대한 물린 곳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며 집에서 찬물 샤워만 하고 있다. 이렇게나 작은 벌레에 물린 상처에도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니.


우리 인간종, 정말 약한 존재로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아무렴.

한없이 겸허해 지려다 이런,

갑자기 또 어깨가 간지럽다.


슬그머니 빌어본다.

천국에는 모두가 사이좋게 공존한다지만 부디 빈대, 너만은 그곳에 없기를.

우리가 영영 재회하는 일은 없기를.





- 상 권을 마치며 -

마감에 허덕허덕 하며 어느새 30회를 찍었습니다. 꾸준함, 지구력 이런것과는 거리가 먼 저에게 스스로 너무 대견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토닥토닥. 애썼어.

한번쯤은 쉴까. 한동안은 잠정 휴재를 해볼까 하던 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꾸준히 응원해주시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계속 힘을 냈어요.


사실 30화가 마지막인 것도 이제야 알았네요. 진작 알았다면 빈대보다는(!) 좋은 주제로 마무리를 지었을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어야 또 다음이 있겠지요?


다음 시리즈는 <마흔에 갑자기 영국이 좀 좋더라고>로 이어집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whynotuk 전 편 만큼 후 편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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