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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분필로 그린 에든버러의 기억 (1)

- 에든버러 국제 아동축제를 찾았다 떠올린 3년 전의 무지개

by Siho

(1편은 2022년의 방문기, 다음 주 연재될 2편은 이번 축제 방문기입니다)


2년 만에 에든버러를 찾았다. 에든버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 국제 아동 축제가 먼저 그 물꼬를 트는데 마침 시간대가 맞아떨어졌다. 단 이틀이지만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알차게 놀다 가리라.


전에 이곳을 찾을 때에는 마냥 이방인이었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친구와 에든버러행 표를 무작정 끊고, 무려 열여덟 시간이나 걸려 새벽에 도착해서는 도통 못 알아듣겠는 대사극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아프리카 팀 공연에서는 그 엄청난 열기와 에너지에 눈물도 주르륵하고. (엄청난 숙박요금 때문에라도) 하루하루가 그다지도 값지고 귀했던, 그런 에든버러를 지금은 기차로 두 시간 반이면 올 수 있다니!


그때 나는 무얼 했었더라??

아차, 그렇지. "Draw the rainbow"라는 버스킹 퍼포먼스를 했었구나.

에든버러를 떠나기 전 날, 하늘의 도우심인지 내내 침침하던 하늘이 그날만큼은 쨍히 빛났다. 이 멀리까지 왔는데, 축제기간이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나에겐 전부 잠재 관객으로 보였다) 이 지나다니는데, 무어라도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갑자기 거리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수도 없고.(영어도 부족하고..) 뭐가 좋을까??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재료는 동료 다희가 바닷가에서 주운 보들보들한 나뭇가지와 수성 분필뿐이었다. 이걸로 뭘 한담. 그나저나 하늘이 참 맑구나…


아하!! 별안간 무지개가 떠올랐다. 급하게 아무 카페엔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손길은 작지만, 하나 둘 마음을 얹다 보면 이 길 가득히 무지개를 채워낼 수 있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즉석에서 구상했다. 과연 사람들이 이 의미를 알아줄까?


친구가 카페 주인에게 말해 못쓰는 박스를 두 개 얻어왔다. 퍼포먼스의 간판이 될 터다. 카페를 나온 나는 유성 매직을 사서 "무지개를 함께 그려요- 그리고 한 걸음씩 지구를 같이 돌보아요- "라고 적었다. 누군가 참가해 줄까? 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도 나 혼자 꾸준히 그려나갈 테다.

고맙게도 친구가 퍼포먼스 전 과정을 사진/비디오로 기록해 주기로 한다. 고마워 삼식아!

떨리는 마음으로 첫번째 획을 그리는 나

끄적끄적 두 번째 무지개를 그리고 있는데 대학생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응, 무지개를 그리고 있는 거야. 이 작은 시작이 계속해서 물결처럼 퍼져서, 여러 개의 무지개가 되는 걸- 이 바닥을 다 채울 수 있는 걸 모두가 보았으면 좋겠어서."

"멋지다! 우리도 해도 돼?"

"물론이야!"

신이 나기 시작했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니!


한 두 명이 시작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웃기웃하며 다가왔다.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 냈어?"

"그냥,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뭔가- 우리가 뭔가 함께 해 낸다면, 그런 작은 마음들이 모여서 아파하는 지구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칙칙한 바닥을 우리가 채워가는 것처럼 말이야. 그냥 그런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멋지다... 넌 예술가구나?"


그래? 나 예술가 인가. 하하하.

형광 노랑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멀찍이서 다가왔다.

'아... 끝났구나'

웬걸? 제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경찰들도 주변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무지개를 하나씩 쓱쓱 그리고는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헛헛. 참.


페이스 페인팅으로 한껏 얼굴을 꾸민 아이들도, 유모차를 끌던 할머니들도 참여했다. 물론 우리가 그리고 있는 걸 보면서도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닥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궁금하지만 그걸 읽을 새 조차 없는 것 같았다. 도시에 살던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재미있게도, 한참 가다가 다시 돌아와 "궁금해서 다시 왔어. 이 퍼포먼스는 무슨 의미야?"라고 물어봐 주는 사람도 있었다.


성글고 큼지막한 무지개,

손으로 한참을 문질러 꼼꼼하게 채운 무지개, 지구, 사랑, 마음 같은 문자들로 내 마음이 빼곡히 채워져 갔다.


이런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추구하는 건 이런 편 편의 모습들이다.

바쁜 발걸음 중에 굳이 멈춰 불편하게 쭈그려 앉아 함께 무지개를 만들어 낸 이 순간만큼은 이들이 지구를, 우리를, 공존을 떠올렸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두 시간 남짓 되었을까, 칙칙하던 바닥은 어느새 색색깔의 무지개로 쌓여갔다.

보도블록의 저 끝까지 무지개를 채울 야심 찬 꿈을 품고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닳아가는 분필의 속도만큼 우리의 체력도 빠르게 소진되었다. '두 박스의 분필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임상 결과가 생겼다.


그렇지만, 못해도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과 지구와 우리, 그리고 노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할머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하는 네가 자랑스러워" 라며 얼굴에 분필이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나를 꼭 안아주고 가셨다.

또 눈물이 차올랐다. 어휴.

"Thank you so much, Have a lovely day!" 나는 울먹이며 할머니의 등 뒤에 소리쳤다. 얼굴이며 손에 분필이 잔뜩 묻어있어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에라. 이 대로도 좋다.


"슬슬 치우자"

친구가 말했다. 그래. 이제 허리도 뻐근해 오는 걸 보니 그만 마무리를 해야겠다. 내일은 비 소식이 예정되어 있으니 아마 이 무지개들도 내일이면 빗물에 지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꽤나 섭섭하여 나는 사라질 글귀들을 하나씩 소중히 사진으로 기록했다.


"시호야, 이리 와 봐 봐"

"왜?"

"이거 봤어? 이거 아까 그 분홍색 분필 계속 기다리던 애기 작품 맞지?"

“어디 봐봐”

친구가 가리킨 곳에는 아까 5살 남짓 한 여자아이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기어코 분홍 분필을 받아내어 엄마에게 한 자 한자 물어보며 써 내려간, 스펠링조차 귀엽게 틀린 그 글귀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You are a rianbow

(당신이

곧 무지개예요)"


아아,

내일은 과연 무지개가 뜨겠구나.



여기 내 마음에도, 이곳 에딘 버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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