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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휴 Aug 12. 2023

남편의 실직

(ft. 부부의 위기)

요즘 나이가 50이 되고나니 주변에 실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이나 금융사든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이 더 그렇다. 남편의 실직은 때로 많은 가정들의 위기를 불러오는데 나 역시도 몇년전에 남편의 실직을 경험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막막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당시 30대후반의 늦은 나이로 결혼해 임신과 출산을 했고, 재취업도 용이하지 않은 40대의 나이라서 더욱 그랬다.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들은 대략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데 일단 모멸감을 주고 (일을 주지않는 것이다) 본인의 입에서 사퇴하겠다는 말이 나오도록 판을 짠다. 그런데 순순히 사퇴를 하지않을 경우에는 뭔가 안 좋은 일에 엮어서 강제퇴사와 자진사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제한다. 내 남편도 비슷한 수순을 겪었고, 20년 가까이 다녔던 회사에서 자신을 난도질(?)하는것에 대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하루중 1/3이상의 시간을 반드시 회사에서 보내게 되며 실직할 당시에는 대략 20여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 상태이다. 어떻게 보면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더 친밀한 관계인데 그래서인지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회사=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라는 착각에 빠지는 사람도 간혹 생긴다. 


어쨌든 그렇게 가까웠던 (혹은 가깝다고 생각했던) 회사에서 내쳐지고 나자 남편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장 생활비가 걱정인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얻었지만 아이가 유치원생인지라 야근을 하지않고 정시출근, 정시퇴근하는 조건으로 입사를 했다. (그만큼 페이를 삭감하겠다고 말했음은 물론이다) 남편은 평소에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가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실직기간에는 전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밤에 걱정이 많아 늘 잠을 설쳤고, 잠을 좀 자라고해도 밤새도록 컴퓨터를 뒤적이거나 앞으로의 걱정때문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낮에 쪽잠을 자는일이 계속되었고 잠이 부족해지자 신경이 날카로워져 예민함은 증폭되었다. 나 역시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널부러져 있는 집안일과 6시땡 하자마자 데리러 가는데도 자신이 유치원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다며 (보통 맞벌이 가정이어도 할머니나 다른 보호자분들이 5시나 5시반이전에 아이를 하교시키곤 했음) 서러워하는 아들을 보며 지쳐갔다. 남편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이 상태(남편의 무직상태)가 고착화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대개 남자들의 약속이란 밤에 있는것이 대부분이라 남편은 낮에는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저녁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러 집을 나섰고 밤에 술을 마시고 돌아와 선잠을 자다가 또 새벽에 깨서 잡코리아같은 사이트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40중반의 나이, 그에맞는 연봉 등 그 모든걸 맞춰줄 회사는 많지 않았고 우리 둘 사이는 서로 조금만 말을 잘못해도 바로 싸움이 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15년을 넘게 열심히 일했는데 집에서 마음편히 쉬지도 못하냐고 투덜댔고 나는 누가 쉬는 것 같고 뭐라 그러냐며 밤에 잠을 좀 자라고 얘기하는... 상호간에 좁혀지지 않는 대화가 계속됐다. 

그러는 사이 3개월이 흘렀고 남편도 더 이상은 안되겠는지 공부를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남편이 뭔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남편은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고 저녁까지 공부를 하고 퇴근했다. 남편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우리가족은 빠르게 안정감을 찾아갔다. 남편은 밤에 잠을자기 시작했고 두달 후 작은 자격증을 하나 취득한 뒤 이번에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보겠다고 했다. 남편이 도서관에서 공부한지 어언 석달쯤 지났을까...? 그동안 남편을 지켜보던 전직장 선배가 자신이 해보고 싶은 사업이 있다며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남편은 그 선배의 제안에 고무된 모습이었다. 어차피 재취업은 어렵다는 걸 인식한터라 남은 선택지는 사업뿐이었는데 둘은 몇 번의 회동을 함께하더니 금새 의기투합해 같이 동업을 하기로 했다. 핸드폰 데이터 복구업이었다. 둘 다 핸드폰 제조회사에 다녔던 터라 핸드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앞으로 핸드폰이 컴퓨터처럼 복잡해질테니 데이터복구는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사무실을 구하고 인테리어도 거의 직접 했으며 가급적이면 큰 돈을 들이지 않기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핸드폰 복구업이라는 것은 컴퓨터와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나 역시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명함을 비롯해 대부분의 판촉물들을 만드는 것에 힘을 보탰다. 나는 남편이 첫 달에 내게 가져다 준 수익 20여만원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회사에 다닐때는 그저 회사에 출근만하면 월급이 나왔지만 사업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첫 달에 20만원을 가져다준 남편은 두번째 달에는 조금 더 많은 돈을 가져다주었다. 사업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터졌다. 동업자와의 관계가 삐걱댄 것이다. 남편은 데이터 복구수요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복구프로그램의 자체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동업자 선배는 그 일은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리스크가 크다며 거절을 한 것이다. 남편은 아쉬워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관철시키지 못하고 결국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뜻을 꺾었다. 그 사이 다른 회사들이 먼저 프로그램 개발에 나서며 결국 남편의 회사는 시장선점을 하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안정주의로 흐르며 한달에 200-300만원정도를 (당시 최저임금은 5천원 정도였음) 가져가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동업자와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남편은 결국 동업을 해지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은 기존 사무실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자신은 다른 곳에 새로 사무실을 차렸다. 기존 거래처 역시 동업자에게 다 넘기고 나온 남편은 다시 시작해야하는 형편에 처하고 말았는데 재창업이나 마찬가지여서 나는 걱정이 많았다. 그때 내 지인으로부터 삼성과 협력을 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에게 전달했는데 남편은 처음에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냐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어처구니 없어했지만 그 이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결국 삼성과 협력하게 된다. 삼성에서 인정을 받자 남편의 사업은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물론 업체 특성상 개인과 대면하는 일이 많고 단골이 생기기 어려운 업종이라 매달마다 이번달에는 적절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항상 있다. 남편이 혼자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직원을 뽑자고 했으나 문재인 정권에서 최저임금이 너무 오르는 바람에 직원충원도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남편이 밖에서 영업을 뛰고 내가 안에서 최대한 돕는 형태로 일을 하다가 이번엔 코로나가 터져버렸다. 코로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우리도 그때 많은 빚을 얻어야만 했다. 저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었기 때문에 주변에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남편의 사업은 다른 업종에 비하면 타격을 덜 받은 편에 속했다. 매출감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대재앙속에서 어떻게든 절치부심한 결과 코로나 초반 1년 이후에는 다시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코로나19때도 비교적 선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1인기업이라는 데에서 찾는 듯 하다. 아마도 직원이 많았다면 쉽지 않았을 수 있다. 한동안 회사를 키우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던 남편은 코로나때 완전히 그 뜻을 접고 향후에도 1인기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간에 다른 사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주변에 1인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들과 뜻을 맞춰 일을 벌였다 말았다 한다. 나 역시 남편사업에 같이 하는데 아이교육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일하지는 못하지만 인쇄물 관련작업은 언제나 내 일이다. 남편이 벌였던 또 다른 사업에 가담해 영업을 해서 얼마간은 그에 준하는 영업비를 받기도 했다. 


처음 남편이 사업을 한다고 했을때 시부모님은 엄청 반대하셨다.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해 선택권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러셨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오신 두 분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사업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있으실 수 밖에 없었고, 남편을 말리기는 커녕 외려 격려를 해주는 내 모습에도 적잖은 의구심을 표하셨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 이제는 우리 남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1인 기업을 하고있다. 그게 유튜버로도, 인플루언서로도, 혹은 전문투자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원하든 원치않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사람외에 어떤 다른것을 가지고 자신의 아이디어로 재화를 버는 세상이 되었다. 처음 회사를 차리기가 힘들지 한번 회사를 차려본 사람에게는 두번째, 세번째의 회사를 차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현재 남편은 내가 맞벌이를 안해도 될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잘 하고있다. 많은 부부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고비를 넘지 못해 부부사이를 망치곤 한다. 나 역시 남몰래 눈물을 흘린적이 많았으나 지나고보니 그것도 한 때였다. 남편이 쉬는 시간이 고작 6달만 될 줄 알았더라면 여유있게 그 시간을 보냈을텐데 정작 그 시간소용돌이안에 있을때는 그 기간이 6개월이 될지 6년이 될지몰라 안달복달했었다. 주변에서 이제 어려운 시간을 또 맞이하고 있는 부부들을 보니 그때의 나처럼 힘겨운 시간을 보내겠구나 싶어 안타깝고 안쓰럽기도 하다. 부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내지말고 잘 극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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