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점 · 소악도
‘안개는 대기 중의 응결핵에 물방울이 응결되어 형성된다. 대기 중의 상대습도가 과포화되어 생기는 현상’이라는 백과사전의 설명처럼, 포화상태의 물방울들 갈 곳을 잃고 지상으로 내려와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다.
새벽안개는 정오까지 사라지지 않고 서울에서 압해도 송공 항까지 버스에 붙어 따라온다.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빛바랜 단풍처럼 전국이 안개정국이다. 좀처럼 옷 벗을 줄 모르는 육지의 안개와 신안 앞바다의 해무로 범벅이 된 11월 셋째 주말 오후 2시. 12 사도 순례길 대기점도 행 여객선 탄다. 해무에 가려진 천사 대교 아슴하다.
늘 혼자 떠났던 여행. 낭만적일 때도 있었지만 청승맞을 때가 더 많았던 여행.
이번에는 ‘바오로 성지순례’ 여행사를 통해 친구와 동행이다. 함께하는 신부님 및 신도들이 많아서 뭔가 풍요롭고 든든하다.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여행지에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나의 뒷모습 사진 찍기. 오늘은 친구가 등 뒤에 있어 즐겁고 행복하다.
순례자의 섬, 섬티아고는 섬의 모양이 점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대기점도 선착장 1번 건강의 집(베드로)부터 시작이다. 김윤환 작가의 작품으로 흰 벽에 둥글고 푸른 지붕이 그리스 산토리니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종이 앙증스럽다. 친구는 종소리를 녹음한다. 청아한 종소리가 바다를 건너 지상의 모든 것들에 따뜻하게 스미고 울림이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신부님의 기도를 놓치고 만다.
순례길의 슬로건은 ‘자발적 가난, 즐거운 불편’이다. 여유를 갖고 싸목싸목 걷다 보면 마음 다독거리는 시간이자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도의 길이 아닐까. 비록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처럼 오래 걷지 않아도 되는 1번부터 12번까지 약 12km의 짧은 거리인 섬티아고. 해안도로 따라 너울너울 춤추는 잡풀이 안내한 4번 생명평화의 집(요한)은 색색의 염소 조형물이 먼저 반긴다.
염소를 키우던 동네 할아버지가 기증한 곳에다 지었으며 하얀 원형의 집은 긴 바람 창이 있다. 할아버지는 먼저 보낸 부인의 산소가 보이게 해 달라는 기증 조건으로 긴 바람 창으로 바라보면 산소가 보인다. 요한의 집과 묘지는 이 창으로 소통하고 있는 듯하다. 할아버지의 애절함이 엿보이는 창이다. 친구는 입구에 나는 바람 창에서 마주 보며 서로에게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순두부처럼 웃어본다.
방파제를 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예쁘지 않은 색으로 감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남촌마을 빨강의 지붕들 에돌아 소악도 노두길 물에 잠겨 보이지 않고, 노두길 입구 5번 행복의 집(필립) 지붕 곡선 위로 뻗은 꼭대기 물고기 모형만이 하늘바다에 헤엄치고 있다. 내부의 유리로 된 십자가로 들어오는 은은한 빛을 받으며 기도하는 순례자의 뒷모습 그 어디쯤 우리가 있고 우리의 계절이 지나가겠지.
시들은 맨드라미 가을이 지나가고 추수 끝난 논과 연못을 낀 Y형 길 숲의 입구. 붉은 기와에 나무기둥이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3번 그리움의 집(야고보) 내부는 어느 신도의 간절함이 묻어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 방문자의 표정을 읽고 있다. 마음의 온도에 비밀을 간직하라는 무언의 눈빛에 살포시 나온다.
썰물의 시간. 대기점도와 병풍도를 잇는 노두길이 환하게 문을 열고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물의 시간이 지나간 자리 노두길에서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으로 추억을 담고 있는 북촌마을 입구 2번 생각하는 집(안드레아) 지붕이 독특하다.
이곳의 특산물 중 하나인 양파의 특성을 살려 이원석 작가는 지붕에 양파를 형상화했고, 고양이가 많아 그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담았으며 내부는 해와 달의 공간으로 디자인되었다는 설명이다.
바다 냉장고 문 열었다 닫았다 망사에 담긴 낙지를 꺼내는 1004 카페 사장의 손길에서 망둥어 한 마리 길 잃고 서성이다 카페 사장에 걸려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는, 그러니까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지 망둥어야.
민박집 비닐하우스에서 저녁 미사를 본다. 신부님의 강론은 4번 요한의 집과 할아버지의 땅 기증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움과 애절함을 전하고 있다. 한번 떠나보낸 비밀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신중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대기점에서 병풍도 잇는 975m의 노두길 썰물에 빈 갯벌 위로 둥근달이 떴다. 밤이 넓어도 부족하지 않는 빛. 섬과 섬을 잇는 이 길처럼 친구와 함께라서 더욱 빛나는 거라며 발걸음이 내게 속삭인다.
오늘은 대기점도 1번 건강의 집에서 5번 행복의 집까지 순서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바다가 읽어주는 건축 미술 작품을 눈으로 만지며 걸었던 순례길. 누군가는 묵상의 길이었고, 누군가는 축복의 길이 되었을 하루을 접어 민박집의 구들장에 내려놓았는지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