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점 · 소악도
자연경관이 뛰어난 다도해해상 국립공원 신안군은 72개의 유인도와 932개의 무인도 등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1004의 섬으로 불린다. 대기점도의 작고 아담한 북촌마을 담아본다. 민박집에서 바라보는 생각하는 집은 빨강 지붕과 조화를 이루며 아침을 열고 있다. 해무가 가득한 골목 어슬렁거리다 마주하는 풍경은 정물화이면서 수채화이고 때론 수묵화로 그려진다.
어제의 바다 냉장고 주인이 운영하는 1004 카페에서 커피 두 잔 낭만을 산다. 마시지 않는 커피지만 빨강 지붕 탁자를 배경으로 친구와 함께 인증 삿도 찍어본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그러나 둘이라서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이자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오늘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의 순례길. 바닷길 열리는 시간 때 맞춰 12번부터 역순으로 시작하기 위해 진섬까지 트럭으로 이동한다. 트럭 짐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노두길 달리면서 바라보는 갯벌. 폼으로 커피 잔 들고 굴러가는 트럭 카페에서 나는 다른 시간을 가고 있다. 이원하 시인의 ‘바다를 보면 어쩐지 번거로워진다 멋지고 놀라워도 번거로워진다’는 시 구절의 은유를 내 방식대로 직역하면서.
12번 지혜의 집(가롯 유다)은 썰물 때 모래 바닷길을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딴섬에 있다.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은화 30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를 왜 지혜의 집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해하다 대답해줄 아무도 없어 나선형으로 쌓아 올린 종탑에 질문을 남긴다. 붉은 벽돌에 요철 첨탑을 세운 12번은 유일하게 성당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의 사각거리는 마음을 모래에 묻으며 바닷길이 열리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이름마저 딴섬은 무인도다. 유배지 느낌으로 전해진다.
진섬 솔숲의 향기와 갯바람의 비릿함이 내통하는 11번 사랑의 집(시몬)은 문이 없다. 너와 나 서로 왕래하면서 소통하고 지내라는 의미일까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밖으로 나가라는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 잠시 숙연해진다.
모자이크 바닥 타일 위에 순백의 건물로 뾰족 지붕에 작고 푸른 창문이 덧보이는 10번 칭찬의 집(유다)은 진섬 입구에 있다.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는 유다의 집을 뒤로 소악도를 잇는 노두길 걷는다.
썰물과 함께 떠나지 못한 배 한 척 갯벌에서 그림자놀이하고 있다. 뻘을 붙잡고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배. 친구는 왜 자꾸 폐선에 혹은 남겨진 배를 자주 찍고 관심을 보이는지 묻는다. 왠지 나를 닮은 듯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그렇다고 얼버무린다.
섬티아고의 동그란 조가비 순례길 표시가 소악도 둑방길 중간 나무기둥에 붙어 9번 소원의 집을 안내하고 있다. 여행사 대표는 스페인 순례 길에서 보았던 조가비 모양의 안내 표시를 응용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프로방스풍의 작은 오두막을 연상케 한다는 9번 소원의 집(작은 야고보)은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민 물고기 모형의 창문과 어부의 안전을 기도하는 모티브로 100년이 넘은 고택에서 가져온 나무기둥이 인상적이다.
소악교회 정원. 약 50년 전 문준경 전도사가 마을마다 다니며 사랑을 실천하고 전도하기 위해 신고 다녔다던 고무신과 보따리가 교회 입구 표지 석 위에 상징적으로 놓여 있다.
물 빠진 바다, 갯벌은 글자 잃은 책 같다. 읽어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갯벌 위에 있는 8번 기쁨의 집(마태오)은 소기점도과 소악도를 애처로이 바라보고 있는 노두길 중간에 있다. 양파의 고장답게 러시아 정교회풍의 황금빛 양파 지붕이 2번 생각하는 양파 지붕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방의 창문들이 모두 황금색이다.
소기점도 언덕 위에 푸른색 문을 배경으로 사각형의 흰색 작품 7번 인연의 집(토마스)은 우리 일행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이다. 푸른 문에 달린 동그란 유리거울로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 사진 찍기에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내부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기다리다 지쳐 사진 찍기를 포기한다.
증도 하면 염전이 먼저 떠오른 곳이다. 그러나 증도 면에서 유일하게 기점도와 소악도는 염전이 아닌 새우양식을 한다. 길을 걷다 듬성듬성 볼 수 있는 새우 양식장들. 양식장에서 막 건져 올린 탱탱하게 물오른 새우. 어제저녁 식탁에 오른 달콤하고 쫄깃한 새우 맛이 지금까지 입안에서 노닐고 있는 것 같다.
호수 위에 꽃처럼 떠있는 6번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은 다가갈 수 없어 멀리서 바라만 본다. 햇빛과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작품의 색이 달라진다는데 흐린 오늘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초롱초롱한 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1번 건강의 집 옆 화장실 벤치에 앉아 12시 송공항 배를 기다리면서, 대기점도~소기점도 217m, 소기점도~소악도 373m, 소악도~진섬 241m의 노두길 한 줄 한 줄 모아 땋아본다. 바닷물이 닿았던 시간과 멀어졌던 시간 사이를 걸었을 순례자들 모두가 12 사도 순례길 땋는 과정에서 묵상과 축복의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잠시 반월도 박지도 퍼플섬. 보라에 물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