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의 꽃 『자산어보』

-흑산도

by 김민재


몸은 검은 흑산에 살았지만 마음은 하나로 돌아가는 현산에 살았다는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 가는 길은 소금기가 목구멍까지 가득했다. 홍도에서 축축한 구름 한가득 끌고 와 부려놓은 흑산항은 많이 어둡고 묵직하다.


흑산도는 동백나무, 후박나무가 우거져 멀리서 보면 산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처럼 섬 전체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국 시대인 828년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신안군에 편입된 것은 1969년도라고 한다.


흑산항에 입도하면 일주 여행 관광버스가 반긴다. 대형 관광버스가 아닌 홍도 숙소 사장이 예약해준 중형버스에 탑승 기사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자동차 바퀴는 굴러가고 ‘진리 지석묘군’과 ‘진리 성황당’ 그리고 멀리 ‘배낭기미 해수욕장’은 차창 밖으로 쓰윽 지나간다.

진리 지석묘
진리 성황당

걸어야 만질 수 있고, 걸어야 비릿한 갯냄새 한 움큼씩 주머니 속에 담아올 수 있겠지만 여행사를 통해서 온 마음 급한 여행자들과 함께하는 일정은 늘 바쁘다. 오늘처럼 버스투어를 여행자들과 함께 할 때는 내가 여행지에서 보낸 말들은 둥둥 떠다니다가 어딘가에 고여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속리산 말티 고개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12 굽이길’ S자형 고갯길을 감돌아 올라서면 상라산 전망대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를 잠깐 비켜 상라봉에 올라서면 흑산 앞바다가 펼쳐진다. 앞을 보면 ‘12 굽이길’ 뒤를 보면 대장도와 소장도가 아래로는 장보고가 쌓았다는 전설의 ‘상라산성’이 말을 걸어온다.

지도바위
지도바위을 다르게 보면 홍어바위
하늘도로
깊은 마을

마리재 넘어 ‘한반도 지도바위’ 잠시 멈춘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위는 한반도 모형이자 조금 돌아서 보면 홍어 모형으로 바뀐다. 바위에 한반도와 홍어가 함께 공존하는 모습에 어제로부터 떠나온 나의 불안이 잠시 주춤하는 시간, 오늘로부터 떠나가는 기록들이 바다 수면에 반짝인다.


사리마을의 옛 이름은 모래미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달리던 버스가 멈췄다. 고장 난 버스는 정비기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도로변 멸치들 곳곳에서 일광욕 중이다. 이 마을은 멸치가 특산물인가 보다. 누군가는 멸치액젓과 다시마를 누군가는 마른 멸치와 톳을 구입하고 누군가는 목포로 나가가는 배 시간이 걱정되어 조바심에 누군가는 배고프다고 아우성 속에서 나는 홀로 물고기 솟대를 따라 유배문화공원으로 들어선다.

정약전이 유배의 꽃을 피운 사리마을. 정겨운 돌담길 따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논 사촌서당(복성재) 마당에 들어서니 그때의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귀 기울여본다.

흑산도에 천주교가 유래된 것은 정약전이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오면서 지역민들에게 전교한 것이 시초다. 벽면을 벽돌이 아닌 바닷가 몽돌로 치장한 흑산 사리 공소 녹슨 종이 성당의 역사를 전한다.

흑산도 어부 장창대의 도움으로 완성된 자산어보란 ‘흑산도 연해의 물고기 사전’이다. 완성 2년 후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둬 원고가 유실될 뻔했는데, 형의 집필 작업을 편지로 응원해왔던 동생 정약용은 제자 이청을 보내 원고들을 수습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산어보는 3권 1 책의 필사본이다.

물고기모형 솟대
사촌서당
사리 공소
소사리 구멍바위(홍어모형을 닮음)

바다는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상관도 없어 보였다. 밀고 써는 파도가 억겁의 시간을 철썩거렸으나,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스치고 지나간 시간의 자취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가득 차고 또 비어 있었다. ~ 마음은 본디 빈 것 이어서 외물에 반응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니 바다에도 사람의 마음이 포개지는 것” 김훈 『흑산』 p10~11쪽


“밤송이 조개에 비하여 털이 짧고 가늘며 빛깔은 노랗다. 창대의 말에 의하면, 갯벌 밭에서 얼마 전에 조개 하나를 보았는데 입속에서 새가 나왔다. 머리와 부리가 이미 형성되어 있고 머리에 이끼 같은 털이 나려고 한다. 그게 죽은 것인가 하고 만져보니, 움직이고 있다. 그 껍데기 속의 모양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변해서 파랑새가 되는 것 이라는데, 흔히 말하는 율구조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승원『흑산도 하늘길』 p229 (승률 조개)


한 마리의 파랑새 되어 날아간 정약전과 그가 남긴 물고기 사전을 남길 수 있었던 이곳, 버스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그냥 멀리서 스치고 지나갔을 돌담길. 바다로 향하는 마을길 걸어 김훈과 한승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유배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다.

자산 문화도서관 내 발자국 소리만 울린다. 1층 자산어보 1실 정약전의 가계도, 생애, 사상, 서학과 천주교, 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의 설명과 사촌서당기, 유암총서, 표해시말, 운곡잡저, 송정사의 해설서가 그리고 자산어보의 유래가 벽면 가득 채우고 있다. 2층 자산어보 2실은 흑산도에 서식하는 갑각류, 물고기, 어류 분류표, 자산어보에 따른 어류 분류와 맞은편에는 향토실과 도서실이 있다.

여행자들 모두 떠난 한적하고 고요한 예리 마을 고래 공원 지나 등대 가는 길 입구. 이미자 흑산도 아가씨 청동상 수평선을 붙잡고 서 있다. 방파제의 끝 등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 멍이다. 바다는 누군가 읽다 펼쳐둔 시집 같아서 아니 내가 쓰다 덮어둔 일기장 같아서 멀리 더 멀리 바라보는데 바다는 생각을 잠시 버리고,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순간순간의 내 삶을 섬 저편에 묻어 두라 한다.


빈 거리 산책을 나왔다. 밤바다는 어둠이 어둠을 뚝뚝 흘리면서 구름이 물빛을 끌어 덮고 내 그림자를 물그림자가 펼쳐 말리는 밤거리를 발자국이 발자국을 섞으며 걷는다. 밤의 미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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