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소록도
기다리다 잃어버리고 잊으려다 놓쳐버린 철길을 눈 시리도록 바라보다가
내 스무 살 적 시간의 길을 거슬러 왔다.
녹동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곳.
그 옛날 녹동항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올 수 있었던 길이 지금은 연륙교로 자동차가 대신한다.
해수욕장은 폐장이라 갈 수 없고 오직 중앙공원으로 가는 입구에 데크 길만이 덩그러니 날 반긴다.
자녀들의 감염을 우려하여 병사 지대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었고,
감염되지 않은 가족과 이 선을 경계로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곳.
길 양쪽 펼쳐진 소나무들은 그때의 그 슬픔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場)"라고 하여 붙인 수탄장 표지판이 쓸쓸히 서있다.
삶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삶에 어떤 방향성과 윤곽을 부여하고, 어떤 무늬를 새겨 넣을지는 개개인의 의지와 역량이라 한다.
그러나 그 공평한 삶.
윤곽조차 잡을 수 없이 삶을 살다가 한센병 환자와 자식들의 운명이 수탄장에 녹아 나 있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울림은 아프게 폐를 찌른다.
나 어리적 피부병 약을 팔러 우리집에 왔던 한센인을 기억한다. 손가락은 뭉개지고 입은 비뚤어졌으며 머리 숱이 없던, 한두개의 손가락으로 약을 팔던, 그러나 진물이 나지 않아 병이 옮지기 않으니 염려하지 말라던 목소리. 엄마 뒤에 숨어 훔쳐보던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하다니. 그것도 생생하게.
적당한 더위와 태양빛에 익어가는 바다는 더욱 파래지고, 무엇에 실려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모를 파도처럼 나도 여기서 철썩이고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 영흥도를 다녀왔다고 한마디 거들고 있는 관광객 한분과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다 보니 애환의 추모비 비석을 지나고 멀리 소록대교가 하늘과 맞닿아 출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들어선 한센병원 박물관 왼쪽엔 아담하게 차려진 ‘아기 사슴’ 카페가 있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박물관 직원이 반긴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은 2016년 5월 17일, 소록도 자혜의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박물관이라 한다.
한센병 자체를 다루는 박물관으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곳으로 소록도의 역사와 자료들을 잘 모아둔 곳이다. ‘백 년의 숨결 천년의 입맞춤’ 박물관을 감상하고 나오면 매주 수요일에 보내준다는 엽서가 있어 나는 나에게 엽서를 썼다.
출입구 옆에 아담하게 붙어있는 빨간 우체통에 넣고, 박물관을 홱 외돌아 중앙공원으로 간다.
친절한 해설사 혼자 온 나를 위해 해설을 자처한다.
그저 감사할 뿐. 모르고 스쳐 지나갈, 눈도장만 찍고 지나쳤을, 사진 한 장 남기면 그뿐일 여기서 나는 운 좋게 해설사의 뜨거운 열정과 만나서 일제에 의해 한센인의 인권이 유린된 깊이까지 듣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감시 실과 단종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곳을 지나 중앙공원으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원 곳곳에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어 그냥 예쁘게 바라볼 수 없다.
오래된 수종의 태산목들 예쁘고 아름답게 단장하고 반기지만, 올곧게 서 있는 그 이면에 숨은 한을 어찌 감추고 있을까?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하운 시인의 시비가 기록되어 있는 돌은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으로 때려가며 옮겨놓은 돌.
죽어도 놓고 죽자고 하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부르는 바위가 안타까운 한세 인의 역사를 말하고, 그런 흔적이 공원 곳곳에 널려있다.
풋풋했던 그 이십 대의 여고동창 소녀들과 함께 했던 해수욕장의 모래알갱이를 추억하며, 오늘 나홀로 나이 쫌쫌히 먹은 아줌마가 되어 바라보는 소록도 해변.
모래는 그 세월의 덧께 만큼 파도에 휩쓸려가고 자갈들이 부스럭 거리며 역사의 한 자락 내 갈비뼈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 속.
가도 가도 천리 길 전라도 그 황토 길은 없지만「보리피리」의 한하운 시인을 생각나게 하고
오마도 간척 사업을 소재로 한 『당신들의 천국』의 이청준 소설가를 그립게 하는
여기에서 슬픔의 시작과 끝을 본다.
소나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다 오지 않는 버스 대신 택시로 녹동항 인공섬으로 왔다.
피서철이 지나간 자리는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인공섬에 난 주인이 되어 모형 물고기 떼와 눈 맞추고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갈 들 듯한 사슴가족 옆 하늘과 맞닿은 석류가 익어가는 공원에서 갯내음에 스며들다 뱃고동 소리를 뒤로하고 녹동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소소한 여인이 왔다간 자리에도 소소한 사연이 쌓여가기를 바라며 걷는데
정자 위에 어르신들 터미널 가는 길을 물으니 ‘쬐금만 가면 되는디요’의 쬐금의 단위 가름할 수 없고
날은 덥다. 터미널은 멀기만 하다.
그 옛날 한하운 시인도 소록도 오는 길이 이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