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경리 문학관
우린 처음의 삶을 살다 처음인 죽음을 맞이한다. 시작과 끝이 처음인 오늘 바로 지금 폴란드의 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 번은 없다」의 일부를 생각하다 오래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여 봄바람 정거장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검은 비 쏟아진다. 평사리 들판이 젖는다.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 앞 뜰 환한 매화꽃 찬란하다. 임이네 마당에 자라고 있는 청보리에 마음 기대며 자박자박 걷는 흙길. 최참판댁 사랑채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 손으로 받아 내본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린 날 고향집 초가지붕 처마의 빗방울 손에 적시던 추억을 소환해본다. 낮은 담장 너머로 백목련 매화 산수유 서로 봄 자랑하는 뒤뜰 장독대 일렬횡대 줄지어 빗방울 토닥토닥. 쪽문 지나 별채로 이어지는 그곳으로 봄비 따라온 풋사랑 지나간다.
누마루에 앉아 악양 들판 바라보며 최참판을 별당아씨를 서희를 그리워하다 우산을 접고 빗방울로 새긴 자목련 꽃망울의 비명 소리 듣는다. 땅의 꿈틀거림이 들리는 듯.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온 봄날 한때 댓잎 바스락거리는 세트장 지나 평사리 문학관이었던 ‘문학&생명관’ 건물로 들어서니 방명록과 함께 시화전 작품들 줄지어 반긴다. 텅 빈 영상실 젖은 엉덩이 드밀어 본다. 박경리 선생의 일대기가 화면에 가득 찼다. 토지의 배경과 작품 소개. ‘파시’, ‘김 약국의 딸들 ’ 시장과 전장’이 거기에 있다. 아슴한 기억 더듬어 보다 만다. 읽은 지가 하 오래되어 줄거리 가물가물.
깐돌 터벅터벅 걷다 보면 ‘박경리 문학관’ 앞마당 아담한 선생의 전신 동상이 반긴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니 한 무리의 관광객들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나도 잠깐 그 틈새에 끼어 하동 녹차의 역사와 선생의 일대기 및 토지의 작품 소개를 듣다가 설명하는 해설사를 뒤로하고 전시실 두루두루 섭렵한다. 사진들, 유품들, 작품집들, 선생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 속 모습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 서는 일’ 선생의 말들이 가슴을 후벼 친다. 왜 아픈 몸 끌고 가면서까지 청승을 떠는지, 돌아가신 엄마 지극히 현실적인 말씀처럼 “거 돈도 안 되는 시는 뭐더러 쓰먼서 늘 아픈다냐” 하시던. 건강한 나였다면 엄마의 말씀이 달라졌을까 모르겠지만 내가 나에게 숱하게 묻던 물음. 작품이 되지 않아 가라앉을 때마다 누군가 내 몸속을 다녀간다는 생각에 자주 나를 주저앉히는 슬픔과 아픔이 공감되어서? 뜨거운 감자.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처럼 버리지 못하는 그렇다고 잘 쓰지도 못하는 늘 마음의 허기에 허덕이는 안타까움의 나도 함께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선생의 말씀이 더 공감이 갔다. 고통과 마주하며 익혀낸 작품들 선생이 존경스럽고 또한 고개 숙여진다.
문학관을 나오니 비가 멎었다. 신발 위로 튄 흙먼지 악양 들판의 숨결이자 ‘토지’ 작품 속의 인물처럼 파란만장을 그린 듯. 뭐라 설명이 안 되는 길 따라 들어선 카페 ‘산과 물’에서 젖은 몸과 마음 녹이며 투박한 찻잔에 차오르는 봄을 마신다. 봄바람 너무 많이 마셔 부른 배 눌러주다 미처 담지 못한 아쉬움 주머니에 넣는다. 시위적시위적 내려오다 만난 천연염색 가게의 유혹. 색의 잔치에 끌려 섬진강 물빛 같은 하동의 색깔 같은 스카프로 봄을 칭칭 두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