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란 우리의 고장이자 조국이다!

4. 목포 문학관(차범석, 김우진)

by 김민재

차범석 관

책장 정리를 하다 만난 차범석 선생의 팔순 기념 제8 희곡집 『玉丹어!』를 다시 읽다 배낭을 꾸린다. 2003년 문화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 주최로 연희단 거리패 연극 「옥단어!」 조금은 웃기면서 슬프고, 가슴이 아려오면서 많이 아픈 옥단어! 주인공역 남미정 님의 연기력이 더 흡입력을 주었던 16년 전 그때의 연극무대가 새록새록. 여기까지 밀려왔다.


“‘산하’란 우리의 고장이자 조국이다!” 선생의 어록과 흉상 지나 ‘차범석 문학의 뿌리’ 병풍 앞에 섰다.

“누가 나더러 문학세계에 있어서 뿌리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 뿌리는 고향이다. 내가 태어나 성장한 고향에 관한 나는 자신 있게 상세하게 알기 때문이다. -중략- 목포에서 태어나 자라고 만났던 사람들 경험했던 것들은 하나의 작품을 꿰어가는 실과 바늘이 되었다.” -「떠도는 산하」 중에서


읽다가 머릿속 꽝 “김 시인은 왜 고향에 관련된 글이 없을까?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고창’에 관련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함동선 교수님의 뼈를 치는 한마디가 여기에 와 멎는다. 마음에 문을 열고 닫는 것이 쉬운 듯 어려운 것처럼 내겐 고향이 쉬운 것 같은데 또한 조심스럽고 어렵기만 하다.


연극 공연 과정 유리관 안에 전시된 '전원일기'의 대본을 쓴 48회분의 친필 원고가 소담스레 쌓여있고 옆으로 ‘산불’ 포스터와 원고들이 눈 맞춰준다. 또 집필실로 재현해 놓은 단출하면서도 동양적 분위기가 풍기는 병풍과 흔들의자와 10시 36분에 멈춘 시계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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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포 평화극장에서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의 춤사위를 보고 막연한 예술 의지를 싹틔우기 시작하면서, 집 사랑채 서고에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였다는 선생은 전쟁 때문에 목포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목포중학교에서 교사 시절 '목 중 예술제'를 시작하여 연극 반을 지도하면서 극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작가였던 시절 선생은 연극에 대한 사랑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일까. 1961년에 발표한 연극 '산불'이 히트를 치고, 이어 극단 신협에서 공연한 '갈매기 떼'의 인기로 연극 대중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인다.

전시실 중앙 원형 벽을 타고 연극 포스터들이 줄을 잇고, 영화 필름이 한쪽 벽면에서 물결치고 있다. 희곡 「산불」 포스터를 비롯 전원일기 등등. 그중 포스터 「玉丹어!」속 포로 뚱한 주인공의 모습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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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단이는 1936년부터 1950년대까지의 어렵게 살았던 시절 목포에서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았던 실존 인물이다. 바보 같고 천덕꾸러기 같으면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까닭이 궁금하여 옥단이의 삶을 소재로 한 희곡을 써야겠다고 7년째 구상했다고 한다. 옥단의 신상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소상히 아는 사람이 없고 그가 언제 어떤 사연으로 목포로 흘러들어 온지도 모르지만 외로운 사람이라는 사실뿐. 목포의 4대 명물로 ‘역전의 맬라꽁’, ‘평화극장 외팔이’, ‘대성동 쥐약 장수’ 그리고 물장수 권옥단이 손꼽혔다고 한다. 『玉丹어!』 푸른사상사(2003)


옥단이의 삶은 우리 현대사의 뒷골목 풍경이자 무지몽매한 여인이 시달려 살았던 우리의 역사이다. 천대했던 한 여인을 통해 우리의 어두웠던 진혼이자, 그럼에도 끈질기게 버티며 남을 위해 베풀다가 길지 않은 생을 마친 옥단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희곡 『玉丹어!』는 가족도 없고 나이도 연고도 알 수 없는 옥단어는 목포 유달산 자락에서 물을 길어주고 이참봉 댁 잔심부름 등을 하며 산다. 태평양전쟁에 강제징집으로 이참봉의 아들 영찬은 이를 피해 피신하다가 검거되고, 옥단이 까지 같이 범인은닉죄로 수감되면서 갖은 고초를 당한다. 해방이 되고 이참봉 댁을 지키는 절름발이 태길은 징병을 피해 멀리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아들 봉찬이를 기다리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옥단이를 참봉 집에서 지내자고 한다. 그러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옥단이는 북교동 공동수도 부근 언덕길에서 실족사한다. 전 10장 중 마지막 장에서 죽은 옥단이는 자신의 상여를 지켜보고 있다. 일제시대와 해방에 이르는 우리의 급박한 근대사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옥단어! 이자 기층 민중의 삶에 대한 씻김 놀이판이 벌어진다는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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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인 실존과 정신적인 환상이기도 한, 어디에 있건 잊혀지지 않았던 내 고향 남도, 과거 50년 동안 할퀴고 억눌리고 천덕꾸러기로 버림받았던 내 산하 전라도, 그래도 나는 한 번도 포기도 절망도 안 했고 언젠가는 기름진 땅에 초목이 무성하고, 천사가 오수를 즐기는 날이 오리라고 한낮에 단꿈을 꾸기고 했던 나의 70 평생이었다. 그러고 보면 산하는 죽은 게 아니라 떠도는 신세였는지 모른다. 나의 극단이 그랬었고, 나의 고향 역시 그랬을 테니 산하는 떠돌다가 어느 날 수평선 저 멀리 함몰될 날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술회한 선생은 2006년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김우진 관

김현 관 맞은편 “창공은 내 위에 살려는 힘은 내 안에” 문구와 함께 흉상이 입 꾹 다물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대한해협에서 사라진 김우진. 그의 연대표와 육필원고가 먼저 눈에 띈다. 옆으로 나란히 ‘김우진의 문학세계’가 액자 안에 한국 연극계의 개척자로 문학적 위상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아기가 훗날 언어학자의 서울대학교 김방한 교수.


생애와 문학 코너 건너 그의 희곡 작품 「이영녀」가 scene1~scene4까지 나란히 나란히. 나도 발맞춰 천천히 읽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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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관 2층 계단 송송 내려오니 나오니 시청에서 파견 나왔다는 이용대 지부장과의 만남.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만 방문하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는 날에는 조용합니다. 방문객이 거의 없지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옆 생활도자기 박물관도 구경하고 가세요.”


이처럼 웅장하고 포근한 문학관에 드문드문 방문객이라니, 아마 시내에서 떨어져 외곽에 있는 곳이라 그러겠지 혼자 묻고 답하며 내려온다. 입구에 김현의 흉상이 담긴 문학비 주변 노란 민들레 활짝 내 그림자만 졸졸 따라오는 봄날 차범석 생가터와 북교동 성당 김우진 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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