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 강 깊이 스며든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며 페미니스트. 그녀의 성장과정과 레너드 울프의 만남에서 죽음까지 그려낸 『런던이 사랑한 천재들』(조성관) 읽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슬프고 아픈 생이 이해되면서 목마와 숙녀가 더욱 쓰리게 다가왔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중략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1941년 3월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 넣고 로드 멜의 우즈 강물과 차가운 포옹을 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 등장한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의붓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어린 시절. 그녀가 평생 성(性)과 남성, 자신의 몸에 대해서까지 병적인 수치심과 혐오감을 갖는 원인이 되어 레너드 울프와 부부 관계없는, 사랑보다는 우정이라고 해야 할 특별한 결혼생활을 한다. 남성과 결혼과 아기에 대한 겹겹의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레너드 울프의 헌신적 사랑으로 결혼생활을 잘 견디던 버지니아였지만 정신질환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힌다. 그 결정적 요인은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폭력이다.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공간이었던 런던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걸 보면서 자신의 내면이 송두리째 파헤쳐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정서적 안정판에 균열이 생기면서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어린 시절 성추행당한 트라우마가 신경쇠약증이 깊어져 59년간의 생을 마감한다.
인제 가는 길. 연두에 산 벚꽃 듬성듬성 하얗게 빛나는 것이 멀리서 보면 꼭 어렸을 적 기계 독 오른 머리칼 속 부스럼처럼 보일까. 뭐라 설명 안 되는 그 길의 끝에서 만난 박인환 문학관 출입구 옆에는 선생의 사진을 시작으로 「세월이 가면」「목마와 숙녀」「얼굴」「인제」가 유리벽 안에서 문학관을 지탱해주고 있다.
제천에서 문학기행을 위해 답사 나왔다는 두 분의 시인과 세 명의 군인 지나간 자리에 친구와 내가 문학관을 채운다. 문학관에서 군인의 만남은 긴 여운을 남긴다.
1950년대의 명동거리를 재현해 놓은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사랑방 ‘마리서사’ 책장 어문각의 『신한국문제작가 선집』 학창 시절을 불러온다. 몇 날을 아버지 조르고 졸라 얻어낸 전집. 밤새가며 읽었던 아련한 추억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나의 70년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던 전집을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김수영 시인의 모친이 운영하였다는 빈대떡집 ‘유명옥’. 모더니즘 시운동의 시초가 되었다는 그 옆 50년대 문인들의 희로애락과 낭만 젊음 예술을 이룬 ‘봉선화 다방’. ‘봉선화’가 촌스러워 “봉선화 너무 소녀적인데 마담은 무슨 생각으로 '봉선화'라 했을까요”라는 질문에 마담의 대답은 “울 밑에 선 봉선화 너무 처량해서요. 그러나 해방된 명동거리에 봉선화가 보고 싶어서요.”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이봉구)는 말하고 있다. 찬란한 명동 예술인들 삶의 집합 처이자 추억의 다방 ‘모나리자’에 들어서면 ‘버지니아 울프와 목마와 숙녀, 모딜리아니와 가을 유혹, 시인 장 콕토와 박인환 그리고 시 「목마와 숙녀」가 있는 아크릴에서 나오면, 사업가 김동근 씨가 예술인들을 위해지어 준 3층 콘크리트 건물 ‘동방 싸롱’이 있다.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뒤 값싼 양주를 공급해 명동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포엠’을 나와 2층 계단을 오른다.
1950년대~60년대 명동 시절에 문인들이 자주 이용하였던 명동의 막걸리 집 ‘은성’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하였던 곳. 김수영,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이봉구, 오상순, 천상병 등 문화예술인들이 막걸리 잔 너머로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던 곳을 그때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세월이 가면」은 ‘은성’의 외상값 대신 즉석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박인환 시, 이진섭 작곡, 나애심이 콧노래로 부르다 그 자리를 떠난 뒤 이봉구와 함께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불렀던 선생이 죽기 일주일 전에 남긴 작품이다. 꽃 피기 전에 외상 술값을 갚는다고 할 때 잘해 줄 걸 꽃 피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냐며 눈시울 적셔다는, 빈대떡집 마담과 세월이 앗아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 묻어나는 것은 회고와 허무의 정서를 박인환과 가장 절친한 벗 김수영은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며 경멸했다고 한다.
세상 떠나기 3일 전 시인 이상(李箱) 추모의 밤부터 매일 빈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되어 1956년 3월 20일 밤 9시경 31세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박인환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눈 뜨고 죽어 친구 송지영이 쓰다듬어 감겨주었다 한다. ‘박인환을 추억하다’ 코너에는 액자 가득 사진들이 선생을 말하고 있다. ‘은성’ 맞은편으로 학생작품인 시화가 열 지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관으로 나오니 조형물들이 봄볕을 받아 빛나고 있다. 석벽에 「목마와 숙녀」 시가 있고 선생의 모습이 있고, 그 앞 탁자 세월 가득 채워진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와 술잔엔 봄바람 소복이 찰랑거리며 벚꽃 눈송이 안주로 날리고 있다.
책 읽는 목마는 「목마와 숙녀」에서 ‘목마’ 이미지를 모티브로 아이들의 작은 도서관으로 이용되는 체험 조형물, 잠깐 기웃거리다 선생의 반신상 코트 바람을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모습. 코트 제치고 품 안에 앉아 듣는 대표 시와 노래 듣노라니, 상처 받은 고결한 영혼의 마지막을 말없이 보듬어 준 우즈 강과 버지니아 울프가 아리게 다가오면서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왔다.
장승 옆을 지키고 있는 노란 의자의 문구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을 바라보다 정자에 한참을 앉아 그렇게 ‘세월은 가고 오는 것’에 골몰했다. 왜 우린 늘 세월이 간다고만 생각했을까? 가고 있다는 것은 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한 해가 가면 새해가 오듯, 떠남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모든 것은 가고 오는 것임을 모르고 사는 너와 내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