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접힌 들판 바람 껴입다

-8. 미당 시 문학관

by 김민재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문화와 예술과 노닐며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상이 됩니다,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고 함께 즐기는 예술이 있어 더욱 풍요로운 문화터미널입니다.’ 고창 버스 공용터미널에 소소하게 걸려있는 액자 속 한참을 그렇게 액자가 되어 들어앉아본다. 선운리행 버스 시간이 주는 기다림 지루함 시린 손발은 허우적거린다. 뽀글뽀글 서로 다른 미장원에서 같은 머리스타일로 한 파마머리 한기와 마주하고 있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그러나 같은 뽀글머리 스타일에서 시골 아낙들과 터미널은 하나로 뭉친 친구 혹은 동지 같다. 어슬렁거리는 잡념 속 구수한 사투리 따라 씹던 찬바람 터미널 벽에 붙여놓고, 썰렁한 상가 집어올 그 무엇도 내겐 없지만 기웃기웃, 그렇게 잡념들 물렁해질 때쯤 버스가 왔다.

외롭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 사이에서 잠시 멈칫거리다 선운리행 버스를 탄다. 구불구불 군내버스 오래 붙들어 보푸라기 뭉실 거리는 구닥다리 머플러처럼 늘어진 길을 간다.

초록이 접힌 들판은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채 서성인다. 눈은 감았다 떴다 생각은 펼쳤다 접었다 몸은 흔들렸다 잠시 멎었다 반복의 버스 안. 오늘 흥덕 오일장인가 보다. 한 무더기 짐 보따리 몸보다 더 큰 부피로 올라서는 어르신들의 등 굽은 오전이 덜컹 인다. 전라도 사투리의 달콤함은 누룽지처럼 구수하다. 어르신들마다 스마트 폰에서 울리는 각기 다른 트로트 가락이 버스 안을 새롭게 하는 마력을 품어낸다.


버스종점. 끝이자 시작인 곳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미당 시 문학관은 벽에 걸린 달력처럼 겨울에 매달려 있다. 손 닿지 않은 고요가 바람을 타고 간다. 디딛는 발자국마다 고요를 잘디 잘게 썰고 있는 공기는 초록 접은 잔디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문 열지 않아도 스르르 열리는 감정은 자동문 같다.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새는 문학관 입구 제2전시동 들어서면 먼저 반기는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과 옆모습 선생의 사진. 미당의 생애와 작품집 제 모습 뽐내며 진열되어 있고, 선생의 사진 흰 벽면을 채운 그 아래 검은 소파 잠시 쉬어가라는 듯 기역자로 키 재기하고 있다. 액자 안 친필 시, 육필원고, 연구논문. 한발 한발 전시관을 흘러 다니는 선생의 시어들 삼키기 위해 커다래지는 눈, 내게로 건너오는 듯 낱말 소리 들리는지 귀 기울여 보는 둥그런 통유리 안 선생의 흉상 건너간다.




제1전시동 1층 시와 사진·시낭송 LP·방명록 지나 양옆 산의 높이가 기록된 세계의 사진 감상하며 한 계단씩 산을 오르듯 계단 오르면 2층 입구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오대양 육대주에 솟아 있는 1,628개의 산을 암송했다는 ‘천재의 노력’ 노크를 한 뒤 들어서면 복원된 서재.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12줄 가야금 말 걸어 보지만 대답은 없다. 3층 문서와 우표 붙은 봉투 사이로 편지들. 4층 발간 시집. 5층에는 파이프·중절모·지팡이·훈장. 여권. 남농 허건이 헌사 한 부채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6층은 전망대 잠긴 문으로 인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선생의 생가와 묘지 볼 수 없는 봄날 같은 한겨울.

터벅터벅 하산하는 계단의 끝 오른쪽 전시실은 선생의 대표 시가 아크릴 터널을 만들고 사각 귀둥이에는 장롱에 몇 벌의 옷과 넥타이 목도리 전시관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휘감고 있다. 원형 탁자를 받치고 있는 낡은 등받이 의자. 선생의 삶을 말하고 있다.


질마재 신화 속 「신부」의 작품은 문학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기다림이라는 숙명에 얽매여있던 우리네 옛 여인의 일생이 그려져 조금은 슬픈. 그러나 마음을 휘젓고 가는.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新婦) 전문

커다란 바람의 자전거 조형물을 뒤로하고 오던 길 반대편 터덜터덜 달리다 보면 초록이 잠든 논두렁 끝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줄기 끼고 주진천과 서해바다가 몸 섞는 장어 풍천 길. 어느 생을 돌고 있을 장어의 꼬리에 매달려 가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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