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관
택시 기사는 사방이 갈대 늪지인 초록 잡풀 무성한 뒷길에 나를 부려놓고 떠난다. 무심히 지나치면 보이지 않을 문학관 가는 안내판 ‘무진 길과 오세암길’ 중 화살표 따라 ‘무진 길’의 바람은 차갑거나 뜨겁고 풀잎은 어떤 비밀을 간직이나 한 듯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눈동자 하나 없는 진한 고요함에 두렵고 불안한 마음 한 귀퉁이가 시끄럽다.
정겹게 다가서는 초가지붕과 낮은 돌담에 움츠리고 있는 오월의 넝쿨장미 휘어져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오후 2시. 정채봉 문학관 싸리문은 열려 있고 마당 가득 내 그림자만 서성인다.
정문보다 후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가다 보면 꼭 뒷문이다. 출구 전시실 들어서니 먼저 반기는 것은 작가의 유품들 소박하게 앉아 있다. 그 옆으로 환한 웃음으로 반기는 작가의 사진과 하늘나라 우체통. 작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편지지에 적어 꽂아두면 그 편지가 하늘나라에 전해질까. 작가님처럼 문필 발이 새록새록 솟아나길 바라는 생각 몇 줄 쓰윽 그어본다.
유리벽 속 작가의 전집 백열등 빛 받아 해맑게 웃고 있다. 맞은편 ‘오세암’ 애니메이션 삽화 병풍으로 서서 말 걸어오지만 내겐 어떤 말도 잡히지 않는다. '마음을 다해 부르면' 윤도현과 이소은이 부른 오세암 ost만이 귓속을 간질간질.
열 지어 신문 스크랩 그리고 작가가 가족과 즐거웠던 시간이 사진 속에서 자갈자갈 귀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다. 생각하는 동화의 작품들, 살아온 길의 인상적인 배냇저고리, 생전에 쓰던 물건들, 오세암의 탄생 비화를 끼고 tv화면으로 비친 풋풋했던 시절의 작가 모습은 잠시 창문 너머 담장을 수놓은 장미꽃처럼 붉다. 연대기 및 문학사상을 지나니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 정채봉’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 뒤로 입구를 나온다.
처마 끝으로 휘어지는 광장 옆 다목적관 지나 살포시 잡아보는.
-김승옥관
‘소설 무진기행 모티브의 공간-순천만
갈대 우거진 순천만에서 무진기행의 의미를 찾길 바랍니다.’
젊은 날들의 작가 사진과 함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글귀가 작별인사이거늘 나는 출구를 입구가 되어 들어선다. 고백하자면 먼저 마음 가는 문안으로 들어섰는데 출구였을 뿐.
대형 영사기 유리 벽안에 갇혀 돌지 못하는 섬 같아서 서까래 바치고 있는 천장을 갈대 벗 삼아 문학관 바닥에 철퍼덕 앉아 나무의 결을 세고 있다. 방해하는 그 누구도 없는 안개바다 같은 문학관 어쩜 이곳 또한 안갯속 같은 내 마음의 무진 인지도 모를. 아니 우리 모두의 삶 자체가 무진 일지 모를.
서로에게 서로의 어깨 의지하고 있는 작품집들, 신문기사 내용 스크랩, 무진기행의 탄생비화, 문학상들의 상패와 상장, 영화 각본 필름 포스터, 각색 영화 대본, ‘무진기행’를 각색한 영화 ‘안개’와 ‘감자’의 포스터 양쪽 기둥을 지탱해 주고 있다. 살아온 길 년표 뒤로 입구 작가의 사진을 밀어내니 문학관과 연결된 작가의 작업실. 문고리 부재중을 알리는 자물쇠 낮잠 들지 못하고 쇳소리로 뒤척인다. “서울에서 3일, 순천에서 사나흘 정도를 지낸다.”는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오늘은 그 3일 중 하루인가 보다.
EBS 1 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다큐프라임-김승옥 무진'을 통해 작가는 필담으로 대화하고 있음을 보았다. 2003년 이문구 소설가의 장례식에 가던 차 안에서 쓰러진 뒤로 언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작가는 글과 언어 대신 점, 선, 색채의 면들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음을 김승옥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기행』를 통해 알았다.
순천시와 프랑스 낭트시와 협력, 2006년 낭트시에 위치한 공원 내에 한국의 산천과 풍경을 재현한 (순천동산)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낭트정원 지나니 청명한 하늘 구름과 맞닿은 순천만. 갈대는 갯벌을, 갯벌은 갈대를 가졌고 나는 무성한 갈대밭 잡풀 속 얼굴 묶인 아득한 슬픔이다. 혼자 있어서 발견한 서러움이다. 계절이 서러워서 무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