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여객터미널에서 매 시간마다 정시에 출발하는 마을 순환버스 타고 풀들도 예를 갖춘다는 예초리 포구에 내렸습니다. 지난여름 폭우로 엄두가 나지 않아 아쉬웠던 마음 푸른 바다에 풀어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 맞추어줄 인적 없는 기정 해변 길 사부작사부작 걷습니다.
썰물처럼 당신의 마음이 빠져나간 뒤 살면서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 두듯이 붙잡아 두고 싶은 날들은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파도소리 들으며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스며드는 아주 소소한 이 순간. 구름은 바다에 빠져 둥둥 떠다니고 나는 아름다운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의 즐거움. 잡으려 애쓰지 않았는데도 선물처럼 행복을 거저 주네요.
예초리 기정해변길
제주의 푸른 바다와 감귤을 상징한다는 파랑과 주황의 올레길 안내 리본이 해풍에 나풀나풀 야생화와 노닐고 있는 세 갈개 길. 왼쪽은 해안 절벽 끝 갯바위에 눈물의 십자가 세워져 있고, 오른쪽은 예초리 마을길, 직진하면 신대산 전망대 황경한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올레길 탐방로와 갈림길에서 성지순례자는 눈물의 십자가 쪽으로 올레 객들은 그냥 지나쳐 간다고 합니다.
“경헌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것이다. 네가 살아가게 될 땅이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만나자꾸나. 그러니 잘 봐 두거라. 저 말을, 이 포구를, 그리고… 어미의 타는 가슴을.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너를 지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제주로 가게 되면 너는 일평생 천한 노비로 살아갈 뿐 아니라 이 어미의 욕된 꼴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경헌 너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때론 주리고 고통받겠으나 강인함으로 살아남아 끝끝내 또 다른 생명을 일구어가는 그러한 사내로 말이다.” 김소윤 소설『난주』p46~47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종국에는 흘러간다. 그늘도 음지도 해가 들면 다시 꽃을 피운다. 지금 우리가 이러하다고 본래 이렇고 훗날 이렇겠느냐,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어미는 잊지도 잊으려니와 그리워도 말거나. 사무치는 그리움은 너를 상하게 하니 차라리 그리움을 모르는 것이 나으리라. 극통 한 아픔은 이 어미의 가슴에 묻고 피눈물도 어미가 흘릴 것이다. 너는 그저 울고 떼쓰며 입고 먹으며 숱한 세월을 한날같이 아이로 자라거라,” 소설『난주』p50
정명련은 정약현의 딸이자 황사영의 부인입니다. 제주에 도착하여 대정현에 배속되어 명련이란 이름 대신 난주라는 관비 명을 얻게 됩니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은 배론의 산속 굴에 은신 중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폭로하고, 외국군대를 이용해 조선 정부를 타격할 것을 명주 천에 호소문을 써서 북경으로 발송되기 직전 황사영의 백서는 발각됩니다.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합니다. 정명련과 두 살배기 아들은 제주도 관비로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각각 귀양을 가야 했지요.
눈물의 십자가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명련은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물생이 끝 갯바위에 내려놓았답니다. 이곳은 물살이 센 곳이면서 끝이 있다는 뜻의 예초리 동쪽 해변입니다.
예초리 사람 오상선이 소를 먹이러 이곳 벼랑에 가게 되고,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배냇저고리에 아이 부모와 아이 이름이 적혀 있는 아이가 절벽에서 울고 있어 아이를 키우게 되었답니다.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를 혈연으로 여겨 두 성씨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며,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추자 탐방 안내책자) 참고
우리나라 111번째 천주교 순례길. 경한을 놓고 간 물생이 끝 바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는 나무 계단 내려갑니다. 한발 한발 내 디딛릴 때 어미와 자식이 생이별 한 장면을 그려보며 마치 내 것인 양 가슴이 아려옵니다. 갯바위를 치고 내리는 파도는 그때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과 바다 또한 물색없이 맑고 투명합니다.
신대포구
황경한 묘 가는 길신대 포구 지나 억새꽃처럼 휘어진 고개 길 넘어 ‘자연생태 휴양공원 조성사업’으로 예산 확보가 안 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정자에 앉아 황경한 묘소를 바라보는 그때 차에서 우르르 성지순례 단 엄숙합니다. 두 모자의 슬픈 이별이 가슴에 닿아서 이겠지요. 그러다 쉽게 차로 들이닥친 순례 단과 햇빛에 얻어맞고 헉헉 거리며 걸어온 나와의 거리를 재봅니다. 햇빛과 해풍 맞으며 걸어오길 참 잘했다고 풍경이 토닥여줍니다.
가을볕 넘치고 내 발자국 꾹꾹 누르며 모진이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관광객 일 가족 언덕길 오르기 쉽지 않은지 그냥 내려갑니다. 모질게 불던 바람의 휴식시간인 오늘의 모진이는 편안해 보입니다. 모진이 해변 앞 수평선이 섬의 발부리를 잡고 있듯이 어느 강태공에 끌려온 생선들이 몸 말리는 그물망은 출렁이는 파랑의 바다 대신 파랑의 하늘로 흔들리고 있는 듯합니다.
황경한의 묘
다시, 신양항 당신의 곁을 비우면 내가 환해질까, 당신이 내게서 벗어나면 환해질까 신양항 마법의 길에게 묻습니다. 바람벽에 이루고픈 소원을 적어 보려 합니다. ‘내 생애 이루고 싶은 바람은’ 밑줄 쫙. 그러나 분필함 속의 분필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쓰고 사자 섬에 공주의 왕관만 씌워주고 나옵니다.
모진이 해변 가는 길
모진이 해변
신양항 마법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