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편지·6

- 묵리 고갯길

by 김민재

여섯째 날

에너지가 방전되었나 봅니다. 해는 중천으로 가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 많은데 온몸이 아파 꼼짝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넓고 깊게 추자도를 담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해안도로 따라 걷고 또 걸으면서 산길을 달렸으면 하는 바보스러움이 오전 한 때를 잠으로 물들게 하였네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을 걷는다.”라고 메리 올리버 작가는『완벽한 날들』에서 말합니다.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점만 찍는 것이 아닌 선을 긋는 여행을 위해 한 곳에 머물다 보면 밤이 아침을 만나면서 그곳의 일상을 보게 됩니다.

골목이 집을 지키고,

고양이가 길을 만들고,

담장은 무화과나무가 키우는,

마을 속으로 들어가다 마주치는 것들에 정겨움이 묻어납니다.


길모퉁이 한편에는 멸치액젓이 숙성되어가는 검은 통들이 열 지어 있는, 그 너머 채마밭에서 노랗게 속이 꽉 차고 깊어지게 끈으로 배추를 감싸주고 있는 모습이 이웃의 어머니들이자 어릴 적 엄마의 모습으로 겹쳐옵니다. 정성이 키운 채소들 싱그럽고 예쁩니다. 나무도 채소도 초록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아마 당신을 처음 만났을 적에도 이러하였을까. 세월에 바래져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요.


추자도는 추자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산이 많다고 합니다. 그중 해발 85.5m의 낮은 산이지만 추자군도를 감상할 수 있다 하여 봉골레산 오릅니다. 정상에는 방사탑과 정자가 있습니다. 잠시 쉬며 바람을 느끼며 멀리 점으로 박힌 섬들을 당기고 있는 수평선을 놓아주고 후포해안에 또 왔습니다. 몽돌 소리와 함께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 바라보다 용이 살던 웅덩이의 전설이 깃든 용둠벙 전망대 데크 계단 오릅니다.

섬의 모든 산과 전망대는 모두 데크 계단 인 듯합니다. 산길 미끄러지지 않도록 관람객을 위한 지자체의 배려이겠지요. 그런데 이곳의 계단은 보수가 필요한 듯 가끔씩 덜컹거리는 곳이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겠지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나바론 하늘 길 절벽 경치 장관입니다.


용둠벙은 용이 되고 싶은 이무기가 착한 일을 하려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추자의 섬들을 다정하게 모여 살도록 모아주었다는 설화이지만, 지각운동과 지형변화가 가져온 수천 만 년의 세월을 지구가 몸부림쳤던 흔적이 아닐까요

봉골레 산
용둠벙 가는 길
후포 해안
용둠벙 전망대
용둠벙 전망데에서 본 나바론 절벽

추자는 8천5백만 전쯤에 화산 폭발로 태어났으며 그 후 지각운동이 숱하게 일어나면서 틈틈이 마그마의 관입이 이루어지고 융기와 침강이 진행되면서 추자가 형성되었다고, 용이 다녔다는 ‘용길’은 마그마의 관입으로 생긴 암맥이라고 합니다. (추자 제대로 만나기) 참고


어제는 숙소 사장님 친구 분들과 하던일 잠시 접어두고 여기 용둠범 전망대에 앉아 김밥과 맥주 한 잔씩 풍경에게 건배를 하였다는 말이 실감 나도록 이곳의 경치는 또 다른 설렘을 안겨주네요. 이혜미 시인은 시집 『빛의 자격』에서 ‘환한 것도 상처를 입는다. 빛날수록 깊이 찔리니까’란 문장이 와닿았습니다. 윤슬에 반짝이는 무수한 반점들이 깊어지면 찔릴 수도 있겠다는 표현에 공감되는 풍경입니다.

추자 대교 건너 묵리 고갯길 터벅터벅 산책하듯 걷습니다. 여섯 날을 건너왔다 건너 간 길. 걸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길. 비로 질퍽한 날도 바람 불어 흐린 날도 밝고 투명한 날도 걸을 때마다 다른 색칠을 하던 해안도로. 멀리 묵리 포구와 섬생이의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입니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 묵리.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처녀 당집 스산합니다. 제주도에서 물질하러 온 해녀가 데리고 왔던 ‘아기 업개’가 사고로 죽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을 지었답니다. 슬픔이 많은 곳은 혼자 머물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얼른 마을로 들어섭니다.

마을은 갤러리입니다. 숟가락 나무를 비롯하여 마을 담벼락에 붙은 낱말과 액자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천천히 걸어야만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잔등을 넘습니다. 묵리 마을 뒷산 신양리 마을로 넘어가는 잔등은 지름길입니다. 고개 시멘트 바닥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목축이다 중학생의 J선생님을 그려봅니다. 이 고개 넘고 넘어 추자중학교 가는 등하굣길 파도가 바래다주고 수평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자신의 발자국들을 수없이 벗어던졌을 여기 어디쯤. 선생님의 학창 시절이 올레길 안내 리본으로 전해집니다.

처녀당


숟가락 나무
신양분교와 추자중학교
춤추자 조형물

추자의 10경의 하나로 꼽히는 장작 평사는 30m의 폭에 1.5km의 길이로 만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양항이 확장되면서 진작지의 자갈밭이 10분 1로 줄었고 길고 긴 방파제로 바람에 파도가 들어오지 않아 예전의 모습은 추억 속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고 추자 안내 책자는 적고 있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장작 평사의 수려함을 J선생님은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다가 따박따박 석두리 길 떠끗산 고개 넘으니 또 다른 풍경이 초대합니다. 석두청산 쉼터에 바라보는 사자머리를 닮았다는, 어제 공주의 왕관을 씌어주고 온 사자섬 수덕도와 사시사철 푸르러 푸랭이 청도가 아픈 다리를 잠시 쉬어가게 합니다.

대왕산 가는 길
지두청사 쉼터
청도
수덕도

‘모든 간격에는 구석이 있다는’ 문장을 빌려봅니다. 당신과 나의 간격 사이에 생긴 구석은 어떤 무늬로 그려져 있을까요. 내가 건너온 삶의 간격에는 얼마나 많은 구석이 있었을까요. 구석구석 실수와 허점투성이들과 셀 수도 보이지도 않은 구석들을 메우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또 다른 간격과 구석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여행’ 토닥토닥 마음에게 합니다. 힘들었던 지난날의 내 삶에 대한 나의 선물이라고, 나에게 여행은 그런 거라고.

이전 07화추자도 편지·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