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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Sep 08. 2020

속초에서 북스테이

완벽한 날들에서의 책 읽는 낮과 밤


 속초는 참 멋진 곳이다. 해변에 앉아 파랗고 반짝이는 동해를 보며 따스한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곳, 시내 어디를 다녀도 웅장한 설악산이 보이는 곳. 푸른 나무와 꽃들의 반영이 아름다운 석호를 두 개나 품고 있는 곳, 시장에서 맛깔난 메밀전병과 감자옹심이를 먹을 수 있는 곳, 청색 바다를 앞에 두고 시원한 물회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휴가를 내고 매일 다니고 싶을 정도로 물이 좋은 온천도 있다. (속초로 캠핑 다녀올 때마다 설악산 아래 온천 마을에 들르곤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속초의 멋짐을 다 말하기에는 모자를 정도로 매력이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최근 몇 년간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속초의 서점들이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동네 서점인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점은 그 존재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동아서점은 속초에서 60년 넘게 문을 연 곳으로 다정함이 묻어나는 곳이다. 손글씨로 책을 추천하는 작은 메모를 책 곁에 붙여두는가 하면 주제별로 책을 잘 선별해 진열해서인지 책 고르는 즐거움도 가득하다. 문우당 서점 또한 40년 가까이 자리한 지역서점으로 감각적인 책 진열이 멋진 곳이다. 이곳은 청초호가 가까이 있어 한 바퀴 산책하듯 다녀갈 수 있는 곳이라 더욱 정감이 간다.


 이렇게 속초의 서점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완벽한 날들에서 북스테이를 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두 해 전 여름, 복직하기 전 속초에서 한 일주일 머물기 위해 숙소를 알아보던 중 독립서점 완벽한 날들에서 북스테이를 함께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가를 내기 힘들었던 남편은 두고 두 아이들만 함께 한 여행이었다. 일정 중 하루는 북스테이를 하고 싶어 서점에 연락해보니 감사하게도 2층 침대가 있는 화장실까지 딸린 숙소를 내어주시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첫날 일정을 완벽한 날들에서 보내기로 하고 두 아이를 차에 태워 매력적인 도시, 속초로 향했다. 물론 북스테이 하는 날엔, 숙소에서 조용히 책을 읽기로 약속을 단단히 받고서.


서점 외관, 새로운 서점의 문을 여는 것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일이다.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 뒤편에 자리한 작고 따뜻한 이 서점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점 문을 여는 순간부터 완벽한 날들의 공기가 잔잔히 채워졌다. 서점 한편에는 커피와 차를 내리는 카페와 테이블, 그리고 한 켠에는 독립출판 서적들과 잘 정리된 책들, 그리고 그림책 코너가 살뜰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2층에 짐을 풀고는 아이들과 함께 서점으로 내려가서 책을 한 권씩 골랐다. 나는 서점의 이름을 따왔다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을 골랐고 마스다 미리의 그림을 좋아하는 딸내미는 [차의 시간]을, 아들이는 그림책을 고를까 했더니 김윤주의 [행복의 맛, 삿포로의 키친]을 골랐다.(음 아들이 고른 것은 삿포로의 음식들을 그림으로 그린 책인데 삿포로에서 먹었던 라멘 그림을 보고는 일말의 고민 없이 선택하더군요.) 각자 고른 책을 들고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우리들. 아이들은 녹차라떼(워낙 녹차라떼, 녹차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나는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조용히 문장을, 그림을 읽다 보니 오후 시간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완벽한 날들과 커피 한잔, 한 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서점에서.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이른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시장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 오기로 했다. 찾아보니 서점에서 꽤 가까운 곳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슬슬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익숙한 듯 낯선 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참 즐거운 일이다. 엄마를 믿고 이곳저곳 즐겁게 다녀주는 아이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드는 저녁.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상큼한 풀냄새가 났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가 산 것은 담백한 메밀 전병과 고소한 꼬마김밥이었다. 무겁지 않은 가벼운 식사로 책을 좀 더 읽을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간단히 토스트와 씨리얼을 먹을 수 있는 공간과 방문 옆에 투숙객들이 남겨놓은 글들


 저녁을 먹고 들어가니 슬슬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문에 새겨진 글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언덕과 낮은 지붕들이 모여있는 바닷가 도시의 작은 서점에 머물기로 한 밤. 우리를 맞아주었던 문장을 따라 읽어보았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과 속초의 작은 독립서점이 세상을 바라보는 선한 시선이 느껴지며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인 것이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할지 말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떠오른 답은, 그저 아름다운 세상에 감탄하며, 감사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것 하나 추가하는 삶을 사는 건 어떨까? 하는 되물음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2층 침대가 있던 방의 창문, 아름다운 문장.

 그날 밤, 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이층침대가 신기한 아이들은 이층침대에 올라가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불편한지 모두 다 아래로 내려와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봤다. 그리고는 서점에서 하루 잠을 자는 것에 대해 장황하게 일기를 써 내려갔다. 항상 아이들에게 여행을 가면 그림이나 글로 기록을 남기자고 권했더니 일기장과 색연필을 잘 들고 다닌다.(읽을 책 두세 권도 항상 가지고 다니도록 권합니다. 저도 늘 그러하고요.)


3층 루프탑. 낮은 지붕들이 서로들 다정하다.


 아침으로 시리얼과 토스트를 먹고 아이들과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다는 것은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3층에만 올라가도 동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참 좋았다. 멀리 우리가 세워둔 차도 보이고 낮은 지붕들 사이로 모여있는 집들도 친근해 보였다. 햇살은 따뜻하고 파란 하늘이 옥상 위로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옥상 담벼락에서도 어떤 문장이 반짝 빛을 내었다.

모든 사람은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4조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문장이었다. 일에 지쳐, 생활에 지쳐 미뤄두었던 꿈과 마주하는 시간들은 휴식 자체이며, 여가를 즐기는 것이리라. 뭔가 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벅차게 느껴지는 순간에 세계인권선언 24조 우리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일부로라도 상기시켜주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이제 나가야 할 시간. 각자 가방을 둘러메고 체크아웃을 하려 1층 서점으로 내려가니 사장님이 커피를 한잔 내려주신다. 어제 녹차라떼를 잘 마시던 것을 기억하시고는 아이들에겐 둘 다 하나씩 녹차라떼도 만들어주셨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완벽한 날들]에서의 하룻밤은 정말 완벽한 날이었다고 일기장에 끄적여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북스테이, 정말 매력적인 시간임이 틀림없다. 그 장소가 속초라면. 그리고 [완벽한 날들]이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차분하게 책을 잘 읽어보자고 아이들에게 약속까지 받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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