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시간

걷기와 차의 상관관계

by 푸른 숲

휴일 아침 걷기가 그리워 산책을 나갈 때 나는 홍차를 우려서 들고 나가곤 했다. 여름날에는 얼음 가득 넣고 티팟에 잘 우러난 홍차를 넣어 시원하게 마셨다. 텀블러에 얼음이 넘칠 정도로 담고 뜨거운 홍차를 부으면 얼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특히 과일 향기가 담긴 마리아쥬 프레르의 볼레로는 차갑게 마시면 무척 상쾌하다. 그러다 보니 여름엔 매일 얼음을 얼리는 게 일이 되었다. 커피를 한잔 마셔도 얼음을 가득 넣고 에스프레소를 넣으면 그 빛깔이 얼마나 또 싱그러웠던가. 가끔은 커피와 홍차를 눈으로 마시는 것도 같았다. 살랑살랑 여름 바람이 가끔 불어오고 상쾌하게 한 모금 들이키는 시원한 차는 진정한 낙원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홍차가 그렇게 매력적이던 계절이 가고 이제는 얼음을 얼리는 손길도 덜 바지런해졌다. 어느덧 찬 바람이 불어오고,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도 반짝거리고, 동네 붕어빵 가게에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밤이 길어지고 아침이 더디 오는 계절이 온 것이다. 이런 계절이면 안을 데우고 싶어 진다. 나의 밖의 것들보다 나의 안의 것들을 따뜻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 계절에 특히나 커지는 것이다. 이럴 때 특히 걷기를 하고 나면 몸 밖의 차가운 기운들을 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차가운 차를 들고 나가면 입도 손도 얼어버려 이럴 때는 걷기를 하고 나서 차를 마신다. 오랜만에 다기를 꺼냈다. 며칠 전 주문했던 지리산 수제 발효차가 도착했기에 다기에 넣어 우리기로 했다. 한 잎 한 잎 정성스레 따서 잘 발표시킨 황차를 다기에 넣으니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담긴다. 잘 말린 찻잎에 지리산의 지난 봄과, 여름이 돌돌 말려있었다. 지리산에 마지막 갔을 때가 한 오 년은 넘은 것 같다. 텐트를 들고 갔었는데 늦은 여름인데도 추웠던 기억이 난다. 깊은 산이라 그늘 자리는 한낮에도 꽤 서늘했었지. 이 찻잎들은 지리산 자락에서 햇빛을 가득 받으며 살았겠지. 맑은 산 공기를 마시며 싱그러운 흙에 뿌리를 두고 낮에는 햇빛과 밤에는 별빛을 받으며 지냈을 찻잎들. 그러고 보니 한 줌의 찻잎이 데려온 것들이 참 많다.




따뜻한 물을 받아 찻잔을 데우고 숙우에 찻물을 받아 적당한 온도가 되게 식힌다. 찻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차를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 안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찻잔을 데우는 일은 차가운 이 계절에 제법 잘 어울린다.




처음 우린 찻물은 비워내고 두 번째 찻물을 우려냈다. 잔에 담긴 맑은 차를 한잔 마시니 역시 예상대로 몸에 훈훈한 온기가 돈다. 은은한 차 향기도 내 안에서 번지고, 이렇게 서너 번을 더 우려 마시고 나니 이 계절이 참 좋은 것 같다. 밖이 차가울 때는 안을 데우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안을 데워 나를 지키는 힘을 만드는 것. 이 계절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닐지.


그렇게 끝나가는 차의 시간이 아쉬워 한 때 즐겨마시던 아리산 우롱티를 꺼내 우려 보았더니 이미 향은 날아간 뒤였다. 그래서 차의 시간 마무리는 새로 구입해야 할 차의 목록을 작성하기로 했다. 우롱티와 일월담 홍차를 좀 더 사고, 겨울이니까 따뜻한 유자차도 좀 사야겠다. 그러고 보니 쌍화차 원액도 좀 더 사야겠다. 그렇게 차갑고 긴 겨울밤을 훈훈하게 데워줄 차의 목록을 쓰는 소소한 일들마저 위로가 되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와 힐링이 좋아 차가운 숲을 더 오래 걷고 오고싶어 진다.




따뜻한 차 한잔이 참 좋은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