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잘란잘란 발리

- 요즘 같은 때엔 마음껏 산책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 그리워집니다.

by 푸른 숲

코로나 19로 자고 일어나면 확진자가 몇백 명씩 늘어나는 요즘에는 발리 생각이 자주 난다. 마스크를 쓰고 외출할 때, 밖에서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볼 때, 파란 하늘과 여행자 가득한 거리를 마스크 없이도 마음대로 다녔던 발리의 시간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잘란잘란 발리

잘란잘란은 인도네시아어로 “산책”, “어슬렁거리다”를 의미한다.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일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발리에서는 그렇게 여유를 장착하고 잘란잘란 거닐 수 있었다. 급할 일이랄 것이 없는 것이 아침을 먹으면서 또는 수영을 하면서 그날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수영 후에 베이커리가 유명하다는 카페에 가야겠다 마음먹고, 몇 시간 뒤 커다란 야자수를 바라보며 수박빵과 커피를 마시게 되는 것, 낮잠을 한 숨 자고 나서 마포갈매기에 가야지 마음먹고는 저녁에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는 것이었다.(발리에서 마포갈매기를 가게 될 줄이야. 김치찌개가 아주 맛나더군요. 쓰고 보니 먹는 일이 주요 일과였네요^^; ) 여행 중 미리 계획한 것은 우붓에 머무르기와 동물원에 가는 것뿐이었다.

우붓에서 지낼 때는 조식으로 대부분 나시고렝 또는 미고렝을 먹었다. 나시고렝은 밥을 채소와 고기, 간장이나 매콤한 고추소스 등과 함께 볶아 만든 일종의 볶음밥이다. 미고렝은 밥 대신 면을 넣은 볶음국수라고 보면 된다. 나시고렝에는 알새우칩 같은 과자가 곁들어 나왔는데 밥과 함께 과자를 먹는 느낌이 새로웠다. 매일 먹다 보니 그 매력이 점점 느슨해졌지만.

잘란잘란 걷기에는 우붓이 참 좋았다. 바다로 둘러싸인 발리섬 안에 깊은 밀림이 있고, 그 안에 푸른 논이 숨바꼭질하듯 숨었다가 펼쳐지는 우붓. 그곳에는 좁은 도로를 두고 많은 여행자들이 걸어 다녔다. 내가 머물렀던 작은 풀빌라는 우붓 왕궁 근처여서 특히 여행자들이 많았다. 마켓이나 식당, 사원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들 모두 잘란잘란 걷는다. 나는 매일 아침, 지루해진 나시고렝과 쓴 커피, 밍밍한 수박을 곁들여 먹으면서 활기 넘치는 거리를 구경했다. 그리고는 우리도 슬슬 잘란잘란 걸을 준비를 했다.

숙소에서 삼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밤마다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피자가게가 학교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전의 피자 가게는 문이 닫혀있었지만 학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행렬로 북적였다. 한 무리의 학생들을 지나쳐 내려가면 메인도로가 나온다. 왕궁을 중심으로 펼쳐진 도로는 모든 길이 그곳으로 이어졌기에 오가며 하루에 한두 번은 왕궁을 만나게 된다. 우붓 왕조가 살았다던 왕궁에는 여러 힌두 조각상들과 전통 양식의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 왕궁 근처에는 연꽃으로 둘러싸인 사라스와띠 사원이 있는데 이 곳도 우붓을 잘란잘란 걷다 보면 자주 지나치게 된다. 특히 사원 옆에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지나가다 시원한 커피가 한 잔 생각날 때 종종 들렸다. 밤에는 사원에서 열리는 깨짝 댄스가 보이기도 했다.

이 길을 따라 빨래방을 찾아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고, 장을 보거나 미술관을 가곤 했다. 그렇게 오전을 잘란잘란 걸었다. 건기의 발리는 뜨겁지만 습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늘로 잘 걸어 다니다 보면 더위 먹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전에 한두 시간 잘란잘란 다니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만다.

그럴 땐 숙소로 돌아가 얼음같이 차가운 풀에 몸을 담근다. 작고 소박한 풀이지만 아이들은 배가 고파질 때까지 풀에서 놀았다. 그렇게 놀고 나면 출출해지기 마련. 우리는 다시 잘란잘란 식당을 찾으며 걷는다. 식당은 트립어드바이저나 구글 평점을 보고 찾아갔는데 대부분은 맞이 괜찮았지. 아마.

이 곳에서는 논 뷰가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찾아갔던 식당도 나름 논 뷰였다. 빈땅 맥주를 한 잔 주문하고 시원하게 마시며 초록빛을 바라보았다. 날은 좋고 기분은 슬슬 좋아진다. 돌아가서는 낮잠을 자고 밀린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우붓에서의 마지막 며칠간은 정글 속에서 머물렀다. 정글 안의 숙소는 시내의 숙소보다 시설도 좋고 푸릇푸릇했지만 우리는 셔틀을 타고 하루에 한 번은 시내로 갔다. 그리고는 악몽을 없애준다는 커다란 드림캐쳐를 지나고 왕궁도 지나고 맛있다는 태국 음식점을 찾아 그렇게 잘란잘란 걸었지.


주로 수영하고 걷고 먹고. 이런 일상들의 반복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발리에서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익숙하거나 단순한 일을 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던데, 단순하긴 하지만 새로운 루틴이어서였을까. 시간이 젤리처럼 천천히 늘어났다. 덕분에 우리도 잘란잘란, 여유롭게 기다란 시간 위를 걸었다.


옛 여행을 추억하다 보니 어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어 마스크 없이 동네 맛집을 찾아 잘란잘란 걷고 싶어 진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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