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라봉, 인생 해넘이를 만나는 시간

그곳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일몰을 만났습니다

by 푸른 숲

봄에 제주에 가면 따뜻한 햇살과 섬으로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오월의 제주는 얼마나 포근할까. 한낮의 공기도 제법 뜨거워 역시 내가 사랑하는 평대리 앞바다에서 보말도 잡고 게도 잡으며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아이들 수영복을 챙겨가자. 놀다가 더워지면 할망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실컷 사다 먹어야겠다. 수국은 한 달 뒤에나 핀다지만 카멜리아힐에 가면 수국을 잠깐이나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5월에 제주를 찾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5월의 제주는 꽤 쌀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채집생활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 손에 이끌려 매일 바닷가로 나갔다. 다행히 햇살은 따뜻해서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 위에 앉아 아이들의 채집생활을 구경했다. 한 번 나가면 두 시간은 거뜬히 지나간다. 찬 바람도 아랑곳 않고 쭈그리고 앉아 연신 바다의 생명들과 씨름하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에도 오후의 햇살이 한 움큼 떨어졌다.

우리 해넘이 보러 갈래? 사라봉에서.

나란히 앉아있던 옆지기가 말을 건넨다. 사라봉은 제주시에서 동부 해안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곳으로 그곳에서도 일몰을 많이 본다고 한다. 그래, 오후에는 사라봉에서 일몰을 보고 나서 좋아하는 두루치기 집으로 가자. 시계를 보니 일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남았다.


사라봉 입구에서 산을 올라가야 일몰 포인트가 나온다고 한다. 그 정도야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등에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십 분쯤 올라가다 보니 제법 평평한 공간이 나왔다. 둘러보니 운동기구들과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까지. 아 여기가 바로 일몰 포인트라는 체육공원이구나. 아이들은 운동기구를 보더니 공원으로 뛰어갔다.

어디 자리를 잡고 해넘이를 볼까 옆지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들이 나를 부르러 왔다. 이유인 즉, 공원에 토끼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따라가 보니 풀밭 위에 하얀 토끼 서너 마리가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토끼풀을 맛있게 먹어주는 토끼와 꼬마의 몸 위로 낮은 햇빛이 또 한 움큼 떨어졌다. 조만간 수평선으로 들어가 버릴 빛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가 서서히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 건 아주 금방이었다. 살짝 수평선에 닿는 듯하더니 이내 해의 머리만 살짝 보이다가 아름다운 하늘만이 거기에 해가 있었구나 짐작하게 한다.

해가 지고 나서 체육공원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갔다. 팔각정에 올라가고 나서야 왜 여기가 일몰 포인트인지 알게 되었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해만 생각했는데 그곳에서는 제주항의 기다란 방파제와 마침 반짝이기 시작하는 제주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으니. 거기다 노을빛이 번져가는 하늘과 어두워지는 사라봉의 나무들이 해넘이의 시간을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해변에서 보는 해넘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제법 어둑어둑해져서야 팔각정을 나섰다. 산 아래 언뜻언뜻 보이는 제주 시내의 불빛들이 아련하게 빛났다. 꽤 쌀쌀한 날씨였지만 추위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들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하며 아름다운 해넘이의 시간을 곱씹으며 돌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제주도 일몰 장소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사라봉이라고 말해준다. (물론 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보는 일몰도 사랑하지만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사라봉의 일몰이 인생 해넘이가 되었다. 참 신기하지. 가끔씩은 잔뜩 기대하고 만난 것들보다 별생각 없이 만나게 된 것들에 감동하고 만다. 사라봉에서의 해넘이를 본 시간들이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