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 동안의 서울 중구 여행

-지난가을엔 여행자 모드로 서울을 걸어 보았습니다

by 푸른 숲

가을날, 평일에 하루 쉬는 날이 생겼다. 그렇게 혼자 있는 날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혼자 집에 있는 느낌이 참 좋았지만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고 창 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어디라도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 여행이라고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일단 지하철 역으로 가보자.

그런데 어디로 가지?

빽빽한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보다가 일단 서울 중구로 가보기로 했다. 몇 해 전 지하철로 타이베이 여기저기를 다녔던 것처럼 호기심을 장착하고 서울을 여행자처럼 다녀보기로 했다. 물론 코스는 나의 취향으로만.


제일 먼저 간 곳은 아크앤북이었다. 아크앤북은 라이프 스타일 큐레이팅 서점으로 보통 서점들과는 달리 책 분류를 Daly, Weekend, Inspiration, Style의 4가지 테마로 나누어 다양한 콘셉트에 따라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차였다.

을지로입구역 1-1 출구로 나오니 바로 서점이 보인다. 서점 왼편엔 초록이들이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입구의 조명들을 지나 서점 안으로 들어갈 때는 꼭 공연장 무대로 걸어가는 듯했다. 이제 좋아하는 책들과 함께 공연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고 누군가 물어보는 것 같아 괜스레 벅찬 느낌마저 들었다. 새로운 서점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서점으로 들어가니 양쪽 엘리베이터 공간을 두고 각각의 벽면 두 군데에 이렇게 책터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책터널은 독일의 예술 서적 출판사인 타셴의 도서를 쌓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보니 그리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책만으로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터널을 지나 서점으로 들어가니 본격적인 서점의 모습이 드러났다. 곳곳에 벤치와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 등이 있었고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는 라운지도 눈에 띄었다. 가로등과 빨간색 전화부스가 있어 이 곳이 책들의 거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참고로 전화부스는 책을 검색하는 곳이었다.

아크앤북에는 책 이외에도 다양한 문구류 등도 많이 팔았는데 나는 작은 아이를 위해 컬러링북 한 권과 큰 아이가 좋아하는 키다리 아저씨 한 권을 샀다. 그리고 캠핑하는 모습이 그려진 마우스 패드도 하나 샀다.

서점 내에는 식당과 카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식당 내에 책도 들고 가도 된다고 하던데 책에 음식이라도 묻으면 책을 사야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도 서점 내에 있는 식물학 카페에 들어갔다. 그린티 라테를 한 잔 주문하고 몬스테라가 그려진 투명한 잔에 라테를 따른 뒤에 주변을 둘러보니 어디서부터 서점이고 어디서부터 카페인지 경계가 모호한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달달한 그린티 라테를 마시며 연필로 떠오르는 영감들을 사각사각 메모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행자 모드로 다니다 보면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책을 보고 차를 마시고 메모를 하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점심을 먹을지는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미리 정해두었다. 그곳은 바로 명동교자.

명동교자까진 십 분 정도 걸어갔는데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이미 대기 줄이 가득했다.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과 근처 직장인들로 꽤 붐볐지만 혼자라고 하니 기다림 없이 바로 1인석 자리로 안내되었다. 유명 맛집에 혼자 오니 이런 점이 좋구나. 주문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위로 얇게 빚은 만두와 함께 시원한 국수 국물이 참 맛있었다. 부드러운 국수와 곁들여 먹은 칼칼한 김치도 꽤나 잘 어울렸다.

밥을 먹고 나서는 근처에 있는 명동성당에 들렀다. 성당 주변에는 점심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당 내부에는 은은하게 비춰 드는 햇빛이 부드럽게 공간을 채우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빛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선한 기운들이 내 안으로도 들어오는 듯했다.

명동성당에서 나와서 또 어디로 가볼까 하다가 청계천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계천은 차를 타고 지나만 가봤지 직접 물길을 따라 걸은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물도 맑았고 무엇보다 물길 주변에 나무와 풀들이 무성해서 걷는 내내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높은 건물들 아래로 작은 수변공원이 길게 이어져 새들이 놀러 나온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볕 좋았던 가을날, 이렇게 시원한 자스민차 한 잔 들고서 서울 중구를 걸어 다니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여행자 모드로 서울을 다니다 보니 평범하게 지나쳤던 것들도 새롭게 보였다. 먼 곳이 아니라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보면 그곳 또한 멋진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일상 속에서도 소소한 여행의 기쁨을 찾는 일, 시간이 날 땐 언제든지 도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