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는 그저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지만 여태껏 보이는 것에 많이 흔들려왔으므로 나는 죽어가는 나무처럼 앙상한 겨울을 버티었다. 겨울이 시작되면 오랫동안 몸살을 앓았고 운동도 삼가고 도통 책도 영화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봄이 되면서 낮은 우울 같던 겨울을 걷어내고 깨어나기 시작했다.
올 겨울에도 여전히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을 버티다가 제주에 가기로 했다. 가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짐을 꾸렸다. 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서둘러 아이들 먹을 밥을 짓고,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을 했다. 일 년의 업무를 정리해 가는 시점에 새롭게 맡은 프로젝트로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짧은 겨울 해는 어느덧 건물 뒤로 사라진 뒤였다. 무엇인가 해결하면 다음 일이, 다음 일을 해결해 갈 즈음엔 서너 개의 다른 일들이 동시에 떨어지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 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바로 두꺼운 외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제주는 너무나도 따뜻했던 것이다. 겨울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엔 아무런 시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초록이 보였다. 가로수도 푸른 상록수가 많았다. 잎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후박나무부터 붉은 열매가 꽃 핀 것처럼 보이던 먼나무까지 겨울도 초록초록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심코 지나가는 밭에는 푸른 무나 당근이 총총했고, 푸른 초지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던 말도 종종 보이곤 했다. 그저 포근한 느낌이었다. 겨울 제주는 앙상하게 말라가던 마음을 조금씩 다독여주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위로, 고마운 위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나의 마음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귤 따기를 해보고 싶었다. 겨울 제주의 초록초록한 풍경들 속에는 무수한 귤나무가 있었다. 서귀포에 머무르는 동안에 정말 많은 귤나무들을 보았다. 반들반들 햇빛을 받아 윤이 나는 귤나무 잎사귀가 무척 싱그러웠다. 그 아래 탐스럽게 달린 귤들이 얼마나 귀여워 보이던지.
이맘때에 서귀포 귤 농장에서는 귤 따기 체험을 많이 한다. 아이들과 함께 나도 체험해 보기로 했다. 농장 사장님이 알려주신 달고 맛있는 귤 따기 팁은 새들이 파 먹고 간 귤 근처에 있는 귤이란다. 나무에 열린 귤은 무한히 따 먹어도 되고, 바구니에 담는 것은 가져갈 수 있다고 하기에 우선 나무에 달린 귤을 톡 따서 먼저 맛보았다. 얼마나 맛있던지 그 자리에서 여러 나무를 다니며 귤을 따서 먹어 보았다. 바로 따서 먹으니 몸 안에 비타민이 와르르 들어오는 것만 같이 상큼하다.
다음으로는 겨울 제주에 가득 피어있는 동백꽃을 보는 일이다. 다른 나무들은 잎도 꽃도 떨구고 겨울을 나는 반면에 황량해지는 겨울에 화려하게 피는 동백꽃은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되고 위안이 되었다. 두껍고 반짝이는 잎사귀와 붉고 단아한 모습의 꽃이 주는 감동이란! 동백이 피어있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된다. 동백이 지는 모습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땅에 떨어진 동백을 곱게 손에 올려보기도 했다.
겨울 동백을 좀 더 많이 만나고 싶어 동백 군락지를 찾아갔다. 동백 수목원에는 커다란 꽃다발 같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주로 분홍, 진분홍, 다홍 등의 화려한 애기동백이 많았다. 먼저 핀 꽃은 이미 지고, 새롭게 피어나는 꽃들은 점점 화려해지고, 앞으로 피어날 꽃들은 작은 봉오리에 담겨 기도하는 사람처럼 경건했다. 눈이라도 내린다면 하얀 눈을 소박하게 이고 피어있을 동백이다. 이 겨울에 만발하는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라도 겨울 제주를 찾는 이유는 충분할 것 같았다.
여행을 갈 때는 항상 책 한 권을 챙겨간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한 권의 책이 서너 권이 되어있다. 특히 제주도에는 아기자기한 독립서점이 많아 한 두 군데쯤은 꼭 방문하게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왔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책들을 읽었다. 사실 읽다 보니 평온한 마음이 되더라. 귤 농장에서 돌아와서도 읽고 동백꽃 보고 와서도 읽고, 산책 다녀온 후에도 읽고. 돌담집에서 귤을 까먹으며 커피를 마시며 읽는 책은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 되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등유 난로의 냄새도 뭔가 아득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숙소의 다이닝룸. 이곳에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서였을까.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한 번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고 가끔은 와인이나 위스키 한 잔을 하기도 했다. 제주도에는 낮에는 베이커리나 카페였다가 밤에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파는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이번에 방문한 카페도 주말 저녁에는 고즈넉하고 분위기 좋은 바가 되었다. 덕분에 싱글몰트 위스키 한 잔을 시켜두고 밤이 내려앉은 카페의 은은한 불빛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제주 토속 음식에도 도전을 해보았다. 이를테면 접착뼈국이나 고사리해장국 같은 이름도 생소한 음식들이다. 접착뼈국은 돼지 뼈와 메밀을 푹 고아 잔칫날에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접착뼈는 돼지머리와 갈비뼈 사이의 뼈라고 하는데 부드러운 고기맛이 인상적이었다. 고사리 육개장은 제주를 다시 가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다. 이 역시 돼지고기와 잡뼈를 넣고 고은 국물에 고사리 메밀 등을 넣고 끓인 전통 음식이다. 푹 삶아지고 부드러워진 고사리와 부드럽고 시원한 고기 국물 한 숟가락에 몸 안의 냉기가 쫘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개운하고 시원한 맛이 벌써 그립다.
겨울 제주에서 귤, 동백, 책 그리고 음식을 맛보았다면 남은 것은 오롯이 제주 자연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나 제주에서 가장 그리워지는 것은 오름과 바다이다. 오름에 오르면 광활한 제주의 땅과 바다, 낮은 오름들 그리고 제주의 바람을 만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푸르기도 했다가 은빛이기도 한 오름은 언제 올라도 너른 품으로 안아준다. 지난 여름에 혼자 올랐던 백약이 오름을 이번엔 가족들과 함께 올랐다. 온통 초록이 가득했던 오름이 겨울이 되니 따뜻한 황금빛이 되어 있었다. 파란 하늘과 황금빛 오름은 그 동안 잘 했다고, 수고했다고 다독다독한다.
겨울 바다는 여름 보다도 더 맑고 파랗다. 제주 어느 곳에서든 바다를 만났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일부러 굽어지는 해안도로로 다니며 아름다운 바다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매일 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그러다 길을 잃기도 했지만. 다행인 건 길을 잃어도 바다를 향한 길만 찾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겨울을 나지 않은 나무는 나이테가 없다고 한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차가운 겨울을 맨 몸으로 맞으면서 단단해지며 나이테를 만든다. 그러면서 나무는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꿈을 꾼다. 여름날 푸른 잎들이 무성해지는 꿈을, 지난 계절의 따스했던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기억하면서 달콤한 꿈을 꾼다.
첫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오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오면 이제 나도 꿈을 꾸려한다. 나의 봄과 곧 무성해질 나의 여름의 꿈을. 겨울이 와도 제주의 겨울을 만날 거라는 희망의 꿈을. 밖이 한없이 차가워질수록 겨울 제주에서의 시간들은 그리움으로 남아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온기를 전해주겠지. 그러니 나는 다시 찾아올 겨울을 기다릴 것이다. 앙상해진 마음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마음을 가지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