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월 그리고 숲.
오월 말, 늦봄인 듯 초여름인 듯
이름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려웠다.
나름대로 밀레니얼 세대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쓰던 아이디가 있긴 했다.
saltdoll 소금인형.
그 이름을 짓던 당시부터 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끔 무슨 뜻이냐 물으면 시인 류시화의 이름을 대곤 했다.
마치 어른인 줄만 알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소금인형'이라는 단어를 보고서는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트를 꺼내 글 한 줄을 적었다.
사라지고 싶다고.
한창 울며 하루를 보냈던 그때의 나는
그저 울기만 해도 소원이 이루어질 그 소금덩이가 부러웠다.
아리도록 시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누가 봐도 다 자란 어른이 되었다.
같은 이름을 쓸 순 없었다.
나를 그 이름으로 소개할 수도 없었다.
이름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없대도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도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여.
한 자도 적지 못하고
멀뚱히 껌벅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무엇인지 설명할 단어 하나 없다니.
그래서 그냥 오월이다.
늦봄인지 초여름인지 모를 조금 더운 날에 태어난 나는 오월.
그리고 숲.
곧 마흔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어린 마음을
다 떠나보내지는 못했다.
깜깜한 밤이면 안락한 집 거실에 앉아
발바닥을 비비며 물처럼, 안개처럼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내가 왔다 간 줄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현실로 끌려와 조금 안도한다.
나와 10년을 함께 산 저 이의 뿌리가 너무도 단단해서,
저기 잠시 걸터앉아 있으면 나도 땅에 발 붙인 듯싶어서.
나도 아이들을 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아이들이 있잖아.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어야지.'
온오프 스위치를 더듬는다.
어제도 나는 잘 살아내었다.
무사히 살아 오늘을 맞이 하였다.
내가 살아온 증거로 나는 글을 쓰고 또 책을 읽는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