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을 배워가는 나의 시간

게을러지고 싶어 1

by 냠냠


-나의 새벽들


어릴 때 내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건 몇 개의 단편적인 장면뿐이다.

유아기엔 영화 *E.T.*를 보며 울던 나,

긴 머리의 언니 옆에서 짧은 숏커트 머리로 울고 있는 나.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내 모습이다.


10대의 나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잘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들을 따라 해보고 싶었다.

공부도, 발표도, 운동도 — 노력으로 해내며

스스로 증명하려 애썼다.


그런데 늘 외로웠다.

그래서 매 학년마다 한 명의 친구만 곁에 두었다.

친구를 잃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애초에 여러 명을 두지 않았다.

좋아하는 아이가 생기면

없는 용돈을 모아 학용품을 선물했지만

그 마음이 관심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런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외로워도 참 성실했다.


20대,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다.

학교생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동안 쌓아온 공부가 바탕이 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덕분에 1등을 원하던 동기에게

의도치 않게 경쟁자로 비춰졌지만,

나는 정작 내 진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첫 직장 면접장에 섰다.

회사에 대해 찾아보지도 않고,

긴 머리에 짧은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왔다.


며칠 뒤 걸려온 전화에

“저를 뽑으시는 건가요?”

당당하게 묻던 내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보다 한 기수 높은 선배와 저울질 중이었다는데,

나는 오히려 면접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를 뽑아야 능력자를 알아보는 거죠.’

그런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가 뽑혔다.


출근 첫날, 반바지를 입고 회사에 갔다.

긴 머리가 지겨우면 숏컷 가발을 쓰고 출근했다.

그때의 나는 참 통통 튀는 스무 살이었다.

규칙보다 나답게 사는 게 더 중요했다.


과장은 나를 모든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

탐방을 시켰다고 해야 할까.

그 덕분에 사람을 만나고, 사업의 흐름을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서 사업을 따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짧은 시간 안에

기획부터 계약, 실행까지

모든 업무를 직접 경험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

내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더 컸던 시절이었다.


무에서 시작하는 삶이라,

나는 아이들에게 부지런함을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단지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뛰고, 함께 배우며

다양한 경험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곁에서 보길 바랐다.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운동복을 챙기고, 다섯 시 오십 분쯤 아이들을 깨워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운동을 마치고, 아침을 먹이고,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그 시간들.


둘째가 고3이 될 때까지

그건 내 하루의 루틴이자,

우리 가족의 리듬이었다.


그리고 학원비에 생활비에 보탬이 되고자

밤 11시까지 수업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차를 몰고

내 아이들을 픽업하러 갔다.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요즘 들어,

이제서야 몸의 반응에 따라 늦잠이라는 걸 자본다.

한때는 게으름이라 생각했던 그 시간이

이제는 나를 회복시키는 쉼이 되었다.


하지만, 게을러지고 싶은데 또 일상의 반복.

그 무료함을 참지 못해

나는 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아마 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쉬면서도 꿈꾸고, 멈추면서도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어느 날,

둘째가 고3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하며

의지할 곳을 찾다 성당의 문을 열었다.

세례를 받고,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알았다.

이제는 내 안에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걸.


성경공부반에서 졸기도 하고, 읽기도 하며

그 시간을 일상의 루틴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힘들 때, 지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위로해 주겠지 —

그 마음으로 오늘도 성당의 문을 연다.


게을러진다는 건,

결국 믿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누군가 내 어깨를 다독여주는 느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