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1

by 시진



하교 후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중학교 때 어울리던 서클은 자연스레 와해되었고 입학 초기라 친구도 없어서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는데, 방에 테레비도 없으니 더욱 무료하다. 나는 대문을 넘어 시장에 들어섰다. 참기름집 옆으로 뽕짝이 쿵짝쿵짝 흘러나오는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가 있다. 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유통되는 카세트 테이프가 아닌 깡통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서 불법 복제품을 판매하는 구루마였다. 나는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시장 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배회하고 서성거렸다.

어느 날,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우며 이리 와보라 하였다.

"니 집이 어디고."

"저 여기요." 나는 참기름집 옆으로 난 작은 골목을 가리켰다.

"밥은 먹었나."

"아직이요."

"니 짜장면 시켜줄 테니까 여 앉아서 구루마 좀 보고 있을래."

나는 할 일도 없으니 잘됐다 싶어 알겠다 했다. 아저씨는 화장실도 갔다가, 통화도 하고 왔다가, 시장 내에 다른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에도 갔다 왔다 하더니 돌아와서는 진짜로 짜장면을 시켜줬다. 나는 그 이후에도 짜장면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학교만 끝나면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저씨가 볼일을 보는 사이에 잠시 자리를 맡아주는 식이었다. 그의 이름은 태총이었다. 나는 그를 태총아저씨라 불렀다.


나는 짜장면을 먹으며 태총아저씨에게 카세트 테이프 사업에 대해 들었다. 하나를 팔면 얼마가 남는다고 했고, 청계천도 갔다 오고 세운상가도 다녀왔다 했다. 태총아저씨는 카세트 테이프를 팔기 전에는 꽤 유명한 조직의 폭력배였는데, 지금은 아끼는 동생들과 조직에서 나와 카세트 테이프 사업을 한다고도 했다. 성광시장 입구에서부터 출구 끝까지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가 대충 열개쯤 되었는데 태총아저씨 구루마를 제외한 나머지 구루마들은 모두 그의 동생들이 하나씩 맡아서 하고 있었다. 즉 태총아저씨의 구루마가 불법카세트 테이프 구루마의 총판인 셈이었다.


태총아저씨는 인사성 밝고 시장에 사는 내가 제격이라 생각했는지 하교 후 매일 지금처럼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신제품 나오면 각 구루마마다 공급도 해줘야 하고, 수금도 하러 가야 하고, 전달사항이 생기면 소통도 필요한데, 매번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 일을 내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일을 도와주면 점심으로 짜장면에 탕수육도 사주고, 저녁에 일이 끝나면 삼겹살 집에도 데려가주었다. 또 아주 가끔 매출이 좋은 날엔 용돈도 두둑이 챙겨주었다.


나는 내 일을 마땅히 즐겼다. 하교 후엔 곧장 태총아저씨에게로 갔다. 그날은 퇴근시간도 아닌데 아저씨가 구루마에 천막을 뒤집어 씌우고 고무줄로 칭칭 감고 있었다. 태총아저씨는 동생 구루마 아저씨들을 불러 모아 어디론가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들을 따라갔다. 가보니 민간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가 태총아저씨네 허가 없이 시장에 들어와 노래를 쿵짝쿵짝 틀어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태총아저씨와 그의 동생들은 그 구루마를 찾아가 경고했다.

"어이. 여기서 장사하지 말고 딴 데 가서 하소."

"뭐고. 니들이 전세 냈나."


태총아저씨와 그의 동생들은 민간 카세트 테이프 구루마의 테이프들을 마구잡이로 바닥에 내던지고, 구루마를 발로 걷어차 장사를 못하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간 구루마 아저씨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라 느껴 염증이 났는지 매우 권태로운 내색을 보이며 구루마 밑에 숨겨둔 각목을 꺼내 들고 성의 없이 휘둘러댔다. 시장은 이들의 소란으로 들끓었다. 태총아저씨와 그의 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허리 뒷춤에서 각종의 연장들을 꺼내 들었다. 나는 영화 속 액션 장면을 떠올렸다. 피를 보겠구나 했다. 그런데 어쩐지 다들 싸우지는 않고 손에 쥔 연장들을 쓸데없이 휘젓기만 한다. 곧 시장 상인들이 몰려와 태총아저씨네를 뜯어말렸다. 잠시 후 경찰차도 나타났다. 이토록 허무하게 끝이 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보니 민간 구루마 아저씨는 떠나고 없었다. 태총아저씨네는 조직폭력배는 아니었지만 시장 일대에서는 그렇게 통했다. 우스갯소리로는 성광파라고도 불렸다. 나는 그즈음 태총아저씨네와 끈끈해져서 호칭을 아저씨에서 형님으로 바꾸었다. 태총형님이라고 말이다.


시장에 사는 나를 제외하고 보통의 학생들은 학교를 가려면 성광시장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 집에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광시장 앞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린다. 그런 그들의 눈에 늘 시장에서 활보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태총형님과 그의 동생들의 팔과 다리에는 조직 생활할 때 새겼다던 문신이 있었는데 사슴, 호랑이, 용 등으로 다채롭게 화려했다. 아마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현역 조폭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태총형님과 그의 동생들이 성광파라 불린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는데, 사실 성광파는 시장 안에서 상인들 사이에 불려진 별명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상인들과 사이가 좋아 상부상조하는 살가운 관계였고, 그저 매일을 고군분투하는 영세민일 뿐이었다. 학생들은 하교 후 버스정류장에서 석규를 매일같이 보았다. 사회인 조폭으로 보이는 아재들과 같이 짜장면을 먹고, 그들의 구루마에서 함께 카세트 테이프를 판매하는 모습을 본다. 학교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내가 바로 그 성광파 조직 소속 건달이라는 소문이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가면 친하지도 않은 놈들이 하나 둘 다가와 빵을 사준다며 매점을 가자 한다. 나는 의아하지만 빵을 사준다니 좋았다. 그 뒤로도 자주 얻어먹었고, 왜 사주는지는 몰라도 친절한 놈들이라 생각했다. 이유 모를 친절에 익숙해져 갈 때쯤이었다. 두어달쯤 지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 학교 1학년의 장군이 되었다. 갑자기 되었다. 학교에서 누구랑 시비가 붙어 싸운 적도 없었고, 서클에 가입한 적도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나더러 1학년 장군이라 한다. 조용히, 비공식적이게 나는 장군으로 불렸다.


학교에는 여전히 서클활동을 하는 애들이 있었고, 나도 관심은 있었지만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단 한 명도 같은 학교로 입학하지 못해서, 아는 친구도 없을뿐더러 갑자기 서클에 가입하고자 인사를 다니는 것이 우스워보여 생각지 않고 있었다. 마침 하교 후 할 일이 많기도 했으니 말이다.

쉬는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창밖에 공차는 놈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드물게 독특한 외모를 가진 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원일과 이창진이었다. 원일은 괴뢰군 같았고, 창진은 소름 끼치게 타조를 닮아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자 흠칫할 수준이었다. 이들은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 하였다.


"그 우리 학교랑 저기 동궁고등학교랑 일전에 일이 좀 생겨가 다음 주에 패싸움 일정이 잡혔는데, 니 와서 좀 도와줄 수 없겠나. 니 이야기는 소문으로 마이 들었다. 조용히 지내려는 것 같아서 서클에서도 조심스러워하긴 했는데 학교 명예가 걸린 일 아니겠나. 좀 도와도."


그날에 알았다. 내가 성광파 조직 소속 건달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고 그 때문에 갑자기 장군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둘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소문은 차치하고 패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나는 패싸움에서 물리적 다툼 없이 승리하는 전략을 알고 있다. 나는 서클도 아니고 서클 활동을 할 생각도 없으니 같이 갈 일은 아닌 듯하고 대신 전략을 짜주겠다 하였지만 그들은 내가 꼭 필요하다 했다.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 나를 대범하게 했다. 왕관을 씌어주니 무게를 견디고 싶어졌다. 이게 무어라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날이 왔다. 맨 앞줄에는 나, 원일, 창진이 섰다. 우리 학교에서 스물다섯, 동궁고에서 서른이 모였다. 쪽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에워싼다. 마치 곧 금이 갈 듯한 공기이다. 시선이 바쁘게 오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는 몇이나 되나 아마도 머릿수를 세고 있을 것이다. 티를 못 낼 뿐 대부분 움츠러들어 있기 마련이고.


패싸움이 끝나고 나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입을 모아 인정하는 놈 딱 한 명만이 남는다. 이건 공식과도 같다.

가장 먼저 나서는 놈, 그놈이 가장 강한 놈이 된다. 저쪽 무리의 맨 중앙에 동궁고 장군이 섰다. 선방은 없고 말만 줄창 늘어놓는 걸 보니 이놈도 볼 것 없다. '잘했나 못했나', '되겠나 해 보까' 하는데 해볼까 했으면 해야지. 말은 길어지나 발걸음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의 눌린 기세를 밟고 올라서기로 한다.


나는 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장갑을 꺼내 손에 끼고 가방을 열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며 말했다.

"우리 조선 놈들은 싸우기 전에 말이 많아."

나는 기다란 자전거 체인을 꺼내 난폭하게 휘갈겼다. 챙그랑하는 쇠붙이 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에 금을 가게 한다. 동궁고 장군 놈과 그의 무리들은 크게 당황하여 제각각 몽둥이, 각목 같은 것들을 손에 들고 덤벼 왔다.


영화 속 패싸움 장면은 개뻥이다. 패싸움하는데 옆에서 누가 죽는지 사는지 그런 것 안 보인다. 내 눈앞에 한 놈만 보인다. 내가 한눈파는 그 잠깐 사이에 상대에게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는데 시선을 돌릴 틈이 있겠냔 말이다. 나는 자전거 체인을 마구 휘저으며 동궁고 장군 놈을 쫓았다. 그놈은 뭘 해보려다가도 내가 휘두르는 체인 탓에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자전거체인에 얼굴을 처맞기라도 하면 아마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뒷걸음질을 치던 동궁고 장군 놈은 무리에서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쫓는 척 따라붙다가 일부러 놓치고 되돌아 현장으로 돌아간다.


현장에 가보니 동궁고 애들 한 두 명이 남아 구석에 널브러져 있고, 싸움은 이미 끝이 났다. 아마 남은 놈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반은 도망가고 반은 쫓다가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든 어디 숨었든 했을 것이다. 늘 이런 식이다. 이 공식은 이번에도 어김없다. 수학 공식을 이렇듯 잘 활용했으면 내가 공업고등학교 올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영웅이 되었다. 서클은 내게 와 역시 성광파 조직이라 그런지 급이 다르다며 나를 찬양해 댔다. 나는 그곳에서도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원일과 창진은 매 쉬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 나의 우정은 전투 현장에서 짙어진 전우애로 맺어졌고, 그 깊이는 날마다 두껍게 쌓여갔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