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가질 궁리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테레비 살 돈 정도만 만들고 싶었다.
학교에서 나는 성광파 조직 소속 건달이다. 동시에 학교의 명예가 걸린 패싸움에서 이긴 장군이자 영웅이다. 나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성광파 소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왕 소문의 실체가 되어보기로 한다.
교모는 어김없이 돌아갔다. 우리 반의 교모 담당은 원일이었다. 1학년 전체 각 반마다 돌려진 교모는 2학년에게 상납되었고, 2학년 교모는 3학년에게 상납되었다. 토요일 오후, 교모가 돌아간다. 돈 쌓인 교모를 들고 원일과 창진이 교실을 나가려 할 때 나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나는 원일에게 교모를 달라 하였다. 원일과 창진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여태껏 성광파 형님들에게 받기만 해서 보답을 할 일이 있어. 앞으로 우리 반 교모는 내가 가져야겠다."
그들은 2학년 선배들에게 허락을 받고 오겠다 했고, 나는 복도 창가에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복도 끝으로 모습을 드러낸 원일이 교모를 쓰고 나타났다. 나는 원일이 돈을 상납하고 왔구나 하여 실망하였지만 기척 없이 평정을 가장하며 수고했다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때 원일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원일은 쓰고 있던 교모를 머리에서 벗으며 소리쳤다.
"니 다 가지라!"
지폐와 동전이 한 데 섞여 원일의 몸 위로 춤을 추며 쏟아져 내렸다. 동전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지폐는 바람에 날려 유려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아 뛰며 환희했다.
나는 그날로부터 토요일 교모의 상속자가 되었다. 성광파 형님들에게 보답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핑계였고, 돈이 갖고 싶었다. 기묘하다. 가져보니 더 갖고 싶다.
나는 갖은 궁리를 하다 태총형님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시장에서 개당 천 원에 파는 테이프를 내가 이천 원에 팔아 올 테니 남는 천 원을 내가 가져도 되겠냐는 제안이었다. 태총형님은 무슨 수로 네가 이걸 이천 원에 팔겠냐고 못할 일이라 했지만 나는 속는 셈 치고 나를 한 번만 믿어보라 하였다. 이것은 대놓고 돈 뜯는 교모와는 엄연히 다르다. 나는 태총형님에게 카세트테이프 50개를 받아와 1학년 각 반의 통들에게 나누어 전달하였다. 팔아달라고 사정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나눠주기만 하면 알아서 돈을 모아 왔다. 태총형님은 그날부로 나를 복댕이라 불렀다.
원일과 창진은 내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줄곧 나의 자취를 부러워했다. 집에 한 번만 데리고 가달라, 하루만 재워달라 귀찮게 졸라댔다. 나는 원일과 창진을 데리고 성광시장 안으로 들어가 자그마한 참기름집을 끼고 난 좁은 골목을 지나서 낡은 대문 앞에 이르렀다. 앞장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되고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철문은 요란하고 불쾌한 소리를 냈다. 곧이어 뒤따라 들어오는 원일과 창진의 모습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하늘 위로 펄럭대는 속옷 만국기 풍경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황홀해했다. 둘은 우리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라디오를 들을 때도 마당의 펄럭거리는 속옷 이야기만 지겹도록 해댔다. 너 좋겠다. 진짜 좋겠다 인마. 진짜 부러운 놈이다 하면서.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원일과 창진이 반 애들을 한데 모아놓고 우리 집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걸 듣는 애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 침이라도 흘릴 참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앉아 그들을 지켜보다가 무언가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그것은 마치 준비되어 있던 답처럼 내겐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들의 빨래를 훔치기로 한다. 속옷을 팔 것이다. 브라자 하나와 빤스 두장을 훔쳐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날 오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그 얇은 천 쪼가리가 무어라고 내 머릿속을 전부 차지했는지 몰라도 그 때문에 어떤 다른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나는 가방을 들고 교탁에 올라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부터 경매를 하겠다. 경매품 첫 번째는 브라자다!"
교실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옆 반 놈들까지 속옷 경매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복도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기어이 참여했으니 경매 후기는 말할 것도 없다. 경매품 브라자 하나와 빤스 두장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놈들의 차지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교복 바지 주머니에 도로쿠 칼을 넣지 않았다. 대신 돈을 넣었다. 그것도 아주 두둑이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속옷경매를 열었다. 더러는 서로 사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주먹이 오가는 날도 있었다. 학교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는 바람에 2학년, 3학년 선배들도 우리 반을 찾아왔다.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모로 상납받았던 돈은 결국 속옷 경매의 매출로 내게 돌아왔다.
주말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환기를 시키려 문을 열어뒀는데, 이웃집 누나들이 수돗가에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요즘 빨래가 하나씩 안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야. 술 처먹고 취해서 어디 벗고 나왔겠지."
그녀들은 깔깔거렸다.
그때 내 방 건너편 쪽문이 벌컥 열리더니 술병이 난 누나가 급히 나를 불렀다. 술병이 나서 속이 쓰리니 위장약 하나만 사다 달라는 심부름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누나들이 시키는 심부름을 꽤 열심히 했다. 속옷을 훔쳐 재미를 보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과 고마움 같은 것도 있었고 보통 생리대, 피임약, 위장약 사 오라는 심부름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게 또 쏠쏠한 게 누나들이 거스름돈을 안 받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나는 위장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심부름시킨 누나 방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렸다.
"위장약 사 왔는데요."
소란하게 어수선한 탓에 대꾸가 없기에 나는 쪽문을 넘어 그녀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누나 셋이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그 좁은 방을 빙빙 돌며 실랑이 중이다. 가시 돋쳐 앙칼진 언쟁이 오갔다. 방구석 한 편에 약을 두고 나오려는데 빨래하려고 던져놓은 옷 무더기 속에 화려한 색의 속옷들이 보였다. 나는 그녀들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그것을 훔쳐 방으로 달아났다.
다음 속옷 경매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도무지 값으로 칠 수 없는 것, 환상을 판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밥도 안 먹고 쫓아온 놈들이 복도 끝까지 줄을 서서 내 경매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비장한 마음으로 교탁 앞에 가 섰고, 천천히 경매품을 꺼내 들어 보였다. 그리고 교실을 향해, 복도 끝까지 들릴만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안 빨았다 이 새끼들아!"
경매 시작가는 평소 경매가의 두 배 이상이었다.
나는 몇 주간에 걸쳐 속옷 경매로 큰돈을 벌었는데, 그 소식이 교무실까지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 학교에서 경매를 할 수 없게 됐다. 매주 내 주머니를 두껍게 채워줬던 속옷 사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쉽지는 않았다. 매주 속옷을 훔치는 것이 내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또 나는 우리 반 교모의 상속자이며, 태총형님의 카세트테이프 사업도 계속 진행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경매 참여자들은 속옷 경매 사업의 끝을 끊임없이 아쉬워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내게 와 사정했다.
나는 그들의 사정이 귀찮아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정 그렇게 속옷이 갖고 싶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든가. 질리도록 볼 텐데."
그 말이 방아쇠가 될 줄은 몰랐다. 속옷 경매에 혈안이 되어있던 놈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하룻밤 재워주는데 얼만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이 냉큼 삼킬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을 불렀다.
"만 원."
그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열 장을 꺼내 후루룩 세어보더니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가자."
금례엄마가 오는 주말을 제외하고 주중에만 예약을 받았다. 한 달치 예약이 순식간에 다 차버렸다. 원일과 창진은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니 그 좁은 방에 최소 네 명 혹은 다섯 명이 부대껴 잔 것이다. 나보다 더 신난 원일과 창진은 예약 장부를 만들어 매일의 숙박객을 관리했다.
나는 그토록 원하던 테레비를 샀고, 하교 후면 원일과 창진을 시장으로 데려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잔뜩 사주었다. 나이스 운동화가 난무하는 학교에서 나는 진짜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 돈이 써도 써도 마르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고등학교를 10년만 더 다녔으면 아마 서울에 빌딩을 올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