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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Jun 21. 2024

당신봄날 아침편지64

2024.6.21 김수영 <여름아침>

24절기 중 유독 잘 기억하는 날들이 있지요. 그중 하나, 하지(夏至)입니다. 낮이 가장 긴 날, 낮 빛이 가장 오래 머금는 날, 하지감자가 첫선을 보고 싶어하는 날, 온갖 먹거리를 상차림 해서 함께 나누면 더 행복한 날. 일년이라는 인생의 산, 가장 높은 곳에 우뚝서서 천하를 둘러보고 하산의 마음을 가다듬는 여름날. 오늘 새벽 6시경이 지나면 하지의 낮 빛이 한 점 한 점 사위어 갈테니, 가장 부풀어 오른 빛의 환한 얼굴을 많이 만져보고 싶습니다.     


금주 간은 여러 지인들로부터 먹거리선물을 많이 받았는데요, 우연히도 하지(夏至)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오늘이 더 귀한 시간으로 다가와요. 어제밤에도 속이 더부룩하여 제 대모님께서 주신 매실즙으로 냉차로 한잔 만들어 먹었더니, 이내 속이 편해졌답니다. 또 텃밭동행하는 성희님은 수업 중인 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제 차 속에 오이, 감자 등을 넣어주고 가셨구요. 글 스승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풍경’ 앞마당에서 홍역꽃같은 화기(火氣)를 품고 있던 보리수나무 열매를 제자들 손에 가득 들려 보내셨습니다. 학원으로 가져와서 열매를 따며, 학생들에게 하나 먹어보라 권했지만, 아이들은 두손 두발 설레설레 싫다더군요. 남편에게 뒷담 한마디, ‘우리 학생들은 나중에 무슨 추억으로 살아갈까’     


늦은 밤, 흐르는 물에 살짝 스치운 보리수 열매를 하얀 설탕과 한겹 또 한겹 쌓으며 과일청을 담아두었더니,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마치 하얀 설원 위에 피어난 붉은 꽃 한 송이를 만난 듯, ‘너무 이쁘지’라며 아들에게 보여주니, ‘그렇게 설탕을 많이 넣는 거예요?’라고 묻더군요....


어젯밤도 제 마음을 두드리며, ‘잘 살았어. 오늘도’라며 잠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다시 새날을 맞아서 지난 추억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고마운 이들을 편지에 담습니다. 장마를 우려하여 월말 말랭이 행사를 내일로 앞당겼는데, 오히려 내일의 비 소식이 있군요. 군산시 입장에서는 울상이지만, 텃밭작물들의 동지인 저로서는 엄청 환영할 일이지요. 김수영시인의 <여름아침>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여름아침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家族)과 같다

햇살을 모자(帽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圓滑)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嗅覺)과 청각(聽覺)과 미각(味覺)과 통각(痛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 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利己的)인 시간(時間)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區別)을 용사(容赦)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苦惱)여      


강(江)물은 도도(滔滔)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天國)도 지옥(地獄)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熟練)이 없는 영혼(靈魂)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慈悲)로운 하늘이 무수(無數)한 우리들의 사진(寫眞)을 찍으리라

단 한장의 사진(寫眞)을 찍으리라  

          

옥정리 전재복시인의 마당에 가득한 보리수나무 열매... 저 초롱초롱한 붉은 빛을 욕심많게 다 이끌고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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