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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봄날 아침편지123

2024.8.19 정성수 <무더위타령>

by 박모니카

‘처서매직‘이란 신조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맘, 충분히 알 것 같아요. 더위를 잘 참기도 하거니와, 땡볕아래 있을 일이 별로 없어서 여름 더위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올해의 폭염상태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아주 간간히 소낙비는 내리지만 여전히 태양덕에 달구어진 지열덕분에 책방꽃들, 팽나무와 잔디는 빛을 잃었어요. 책방지기님이 사다놓은 긴 호스로 물장난 하는 아이처럼 신나게 물 뿌리며 휴일을 보냈습니다. ‘더위가 그쳐 계절이 바뀐다’는 처서(處暑)가 제 몫을 다 해주기를, 저도 처서매직을 기다려봅니다.


이렇게 비가 오지 않아서 득을 보는 것, 바로 여름꽃들이 만발하여 지자체들이 주관하는 꽃 잔치마당인 것 같아요. 한 달 전에 약속했던 말랭이마을 어머님들과의 ‘맥문동꽃길 걷기‘ 하는 날이예요. 작년에 문해교실 할 때 현장체험학습처럼 나들이했었는데, 참 좋은 추억이라고 하셔서 시간을 정했었지요. 저야말로 어르신들 덕분에 단지 꽃만 보고 걷기만 하던 심심한 꽃밭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태주의 시를 읊고 감탄하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와서 갈 때마다 기분좋은 장소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기발한 일을 하실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이제 2주간 남은 팔월, 저게는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핸폰의 일정표를 보니 겹겹이 약속과 할 일을 써놓아서, 자주 잊는 일이 많은 요즘, 더욱더 여러번 확인합니다. 혹여 누가 제 일정표만 보면 세상사 일을 혼자만 지고 가는 사람처럼 써있지만, 세세한 일까지도 써 놓는 습관, 한 개를 하면 마침표식까지 등장시켜 기록을 남기다보니, 더 뚱뚱한 일정표가 되었답니다.


하지만 혹시나 ’치매 아냐?‘ 스스로 걱정할 때가 있을 만큼 요즘 제 자신에게 실수를 해서 기록의 양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글쓰기를 하면 치매걱정 ’NO’라고 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다 맞는 건 아니라고 속으로 항변하곤 하니까요. 그런데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글쓰기습관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더 큰 진짜 위험이 왔을 수도 있겠지요. 손가락으로 쓸 수 있을, 지금의 모습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새벽이네요. 긴 연휴 끝, ‘이제 생업 일을 하고 싶다’ 라는 맘이 드는 순간, 월요일을 맞으니, 안성맞춤 네 글자가 저의 두 발에 힘을 넣어줍니다. 오늘도 35도를 넘나드는 염천(炎天) 지옥 같다고 느끼실 수 있으나, 시원한 냉수한잔 마시며 호탕하게 ‘그까짓 더위쯤이야’라고 훌훌 털어버리시게요. 정성수시인의 <무더위타령>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무더위타령 – 정성수


아하 덥구나 세상사

허공을 구르는 햇덩이

공기 사이로 스멀스멀 녹아내리고

길바닥 위에 반월도(半月刀)처럼 휜

뾰족탑 위의 십자가 그림자

등 굽은 부처님의 귓바퀴 하나

길 잃고 저자거리를 떠돌고

행복하다, 들끓는 대낮 옷을 입은 채

개처럼 간음하는 숨소리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쇠파리 몇 마리

어디론가 온몸의 나사가 하나씩

풀려 나간다

나사구멍 밖으로 몇 개의 넋들이

뿔뿔이 달아나고

가느다란 감각의 선들이 끊어지는 소리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 모두 보이지 않고

귓바퀴 옆에서 소리치는 것 모두 들리지 않고

내 존재의 집은

끝없이 쓰러지는 안개의 나라

지닌 것들은 빈손으로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지우지 않을 것도 지워버리고

가라앉는 침대의 중환자 k씨

속눈썹 치켜들어

회색빛 천정에 난초꽃을 그리는 내과 병실

벽마다 녹슨 창문 열리지 않고

가도가도 무더위 첩첩

하느님 나라에서 내려온 뿔 돋은 천사들

눈도 귀도 혓바닥도 온통 나사가 풀려

지글지글 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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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박지현문우-십이동파에 뜬 쌍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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