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7 나희덕 <어떤 출토>
창이 있는 벽에서 흘러나오는 찬 기운이 제법 스산합니다. 아마도 바깥기온이 꽤나 뚝 떨어져 있을 것 같아요. 어제는 다시 늦여름으로 회귀한 듯한 따뜻한 날씨였는데 말이죠. 말랭이마을 축제가 없을때는 거의 책방에 있어서, 아랫동네 양조장 근처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는 편이죠. 시화판넬체험 약속을 한 무리들을 환대하느라 체험장 문을 열었는데요. 관광객들이 제법 많더군요. 어머님들의 파전, 번데기, 붕어빵 등을 맛보며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처음 마을에 입주했을때만 해도, 마을 분들은 새롭게 변화하려는 마을의 여러정책에 매우 신기해하셨죠. 얼마 전부터, 마을에 협동조합이 생기고, 당신들께서 만드시는 다양한 음식판매도 가능해지면서, 공방과 더불어 작지만 즐거운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평균 80대인데도 언행에 절도가 있고, 인심을 아시고 사람관계에 매우 밝으십니다. 아마도 오랜세월 모진 풍파를 함께 견디고 살아온 내공이 어떤 어려움도 다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특수장비가 있는 것 같지요. 사람사는 세상이라 때로 말도 많고 탈도 있지만, 어울덩 더울렁 살아야 제맛이라는 세상이치를 잘 보여주고 계신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은행나무 노래를 불렀더니, 친구가 부여의 어느 은행나무 사진을 보내왔네요. 사진으로 보기에도 그이의 나이를 가늠할 정도로 매우 골격이 크고, 위엄이 있어보였습니다. 그곳까지 갈 시간이 없기에, 군산의 어느곳에 은행나무 단풍나무가 있는 곳이면 사진이라도 찍어두어야겠다 싶은데, 오늘 비소식 바람소식이 먼저 당도한 아침입니다. <도덕경>에서 말했던가요. ‘표풍부종조(飄風不終朝) 취우부종일(驟雨不終日)’이라고요. 막상 길을 떠나보면 또 다른 풍경이 있겠지요. 변화에 스며들고 위기에 담담해지는 것이 인생인가봅니다. 오늘은 나희덕시인의 <어떤출토>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어떤 출토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 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학생들의 체험활동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