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봄날아침편지296

2025.2.8 최승호<대설주의보>

by 박모니카

휘몰아치는 눈(雪)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이나, 뚫고 나갈것이냐... 수업도 휴강하고 집에서 따뜻하니 뒹굴거리는데, 책방에 택배도착 알람소리가 저를 벌떡 일어서게 했지요. 여전히 쏟아지는 눈길을 뚫고 차를 대령한 남편. 설날아침 조삼님 성묘 코앞에서 미끌어진 차 사고로 다시는 이 차를 안타겠다 마음 먹었는데 하여튼 미운마음 접고서 말랭이로 갔습니다.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항아리들을 보자니, 속담이 떠오르데요. ‘입춘에 장독깨진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찾아온 입춘때부터 유독 대설이었던 것 같아요. 제 발목부츠를 모두 덮을만큼 말랭이에도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각 작가들의 집도 둘러보고요. 예쁜 설경도 담았답니다.


다시 집에 오려니, 갑자기 달달한 호떡이 생각나더군요. 아버지 생전에는 눈오는 날이면 호떡이랑 호빵 군고구마를 제법 샀었는데, 요즘은 동네길, 골목길에 있던 그런 포장마차 보기도 어려워요. 째보선창입구에 부부 호떡이 생각나고 등대풍경도 찍을꼄 차를 돌렸죠. 어젠 부부가 아닌 중년의 형제가 구워준 호떡을 들고 썰물로 드러낸 갯벌을 보며 호떡을 먹었습니다. 살면서 얼마나 이런 시간들이 있을까 싶어 소중한 마음...

째보선창은 제게 가장 특별한 공간이지요. 아버지의 어부직 평생직장터. 우리 오형제 삶의 뿌리터이니까요. 지금은 폐허가 된 건물들이지만, 제 눈에는 대학시절까지 영화로웠던 째보선창의 생동하고 대장다웠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배 한척이 출항하기 위해 반드시 실어야했던 얼음. 그 얼음을 내보내주던 입구에 고목이 자라서 눈길을 잡더군요. 갑자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얼음과 뱃 사람들이 보이는 환영과 환청까지... 폭설을 순식간에 다 삼켜버리는 바다는 추억하는 제 몸마저 강력하게 삼켜버렸답니다. 오들오들 떨리는 한기로 쌍용반점 짬봉을 생각나 한 대접 먹고왔지요.


하늘이 맑아지네요. 대설은 잠시 멈추겠지만, 냉동빙판이 곳곳에 많으니 미끄럼 조심하시고요. 일년 중 눈이 온다해도 기껏해야 며칠남짓, 예쁜 설경 마주하면서 꼭 추억쌓기 해보세요. 외로워질 때 쌓인 추억이 많으면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적셔지겠어요. 오늘의 논어구절은 知者不失人, 亦不失言(지자불실인, 역불실언) -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잃지 않고, 또한 말도 잃지 않는다. 위령공편 –입니다. 최승호시인의 <대설주의보>입니다. 봄날의 산책모니카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둣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꿇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2.8폭설선창1.jpg
2.8폭설선창2.jpg
2.8폭설선창3.jpg
2.8폭설선창4.jpg
2.8폭설선창5.jpg
2.8폭설선창6.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봄날아침편지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