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9 황동규 <봄비를 맞다>
봄날의 아침편지, 첫 시는 황동규시인의 <즐거운 편지>입니다. 만 3년이 넘게 아침마다 시 편지를 쓰고 있으니, 1000편 이상의 시를 전해드렸지만, 저의 첫 마음을 변함없이 이어주는 시가 바로 이 시지요. 처음 편지에 담을 고를 때도 주저 없이 선택한 이유는 대학 1학년때 어느 봄날, 대학캠퍼스의 푸른 잔디 위 제 모습이 생각 나서였지요. 저는 사교성이 부족해서(물론 지금의 제 모습과 비교하신다면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요) 늘 혼자였습니다. 그래도 옆구리에 시집이든 꼭 책 하나정도는 끼어있었던, 속을 드러내지 않던 풋내기 대학생이었지요. 아마도 이 시를 만났던 것도 그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니, 어느새 세월은 40년이나 지나가는군요.
전주와 완주의 인문모임에서 주관하는 <천년전주 시와 연애하다> 2025 프로그램, 1번으로 오신 시인은 황동규(88세) 선생님이었습니다. 제 수업도 연기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네요. 한 시간 일찍 도착하여, 도서관내 커피숍에서 시인의 최신집을 읽으며 노 시인이 겪었던 코로나시절의 경험을 시로써 알 수 있었습니다. 로비에서 시인에게 인사드리고, 싸인도 받고요. 처음으로 가까이서 시인과 얘기할 영광과 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될 것 같은 느낌의 사진을 오는 내내 들여다보았네요...
아시다시피, 황동규시인은 소설 <소나기>를 쓴 황순원 작가의 아드님,,, 17세 고등학생 때 <즐거운 편지>를 썼으니,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를 쓰고 계시는 고령의 현역시인입니다. 귀가 약간 어두워져서 사람들과의 대화에 완전히 자신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준비해 오신 말씀내용을 읽으실 때,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강단 있고, 믿음이 있는지. 당신이 시를 쓸 때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말씀하시고, 예의 있는 화법과 상대방에 대한 경어체는 정말 본받아야 하는 강연자의 모습이셨고요 전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번 전주방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셔서 마음 한켠이 쓸쓸해지기도 했네요...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즐거운 편지’ 중에서)
참석한 분 중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어느 참석자께서 이 시를 낭송해 주셨는데요, 시인께서 일어나셔서 기립박수까지 보내시고요. 한 순간이라도 시인께서도 ‘참으로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셨음에 분명합니다. 신체적으로 아픈 곳이 늘어나면서 집콕할 일이 많아지지만, 가능하면 누군가를 만나고 얘기하는 일을 놓치치 않으려고 한다는 시인의 말씀처럼, 건강히 오랫동안 시작활동 하시면서 독자와의 만남이 늘 준비되길 바라고요,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라고 외치신 시인의 목소리를 제 안에 심어두렵니다. 오늘은 신작시집 <봄비를 맞다, 문학과 지성사 2024>의 타이틀 시, <봄비를 맞다>를 들려드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봄비를 맞다 – 황동규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무대나
갑작스러운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