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어느날 영문학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군산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족 중에서 필리핀출신의 영어강사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영어교육방법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세부전공이 영어교육학 이었고, 박사과정을 이수한 직후여서 프로그램 팀장으로 섭외를 받았다. 교육대상자들은 대부분 군산의 남자들과 결혼해서 온 필리핀여성들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다문화가정 비율이 감소세이지만, 이명박정부 때(2008-2013)의 다문화가족비율은 최고치를 찍었다. 군산 역시 다문화가정의 수가 늘어서 다문화가족을 위한 다양한 행정정책이 쏟아져나왔다. 영어교육프로그램도 그중의 하나였다.
“교수님, 필리핀 친구들은 영어를 잘 하는데, 어떤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나요?”
“그 사람들이 말은 잘해요. 그런데 시의 바우처 사업으로 가정을 방문해서 초중등 학생을 가르칠 때, 영어를 어떻게 교육하는가에 대한 부족함이 많아서 우리 대학에 의뢰가 왔어요.”
교육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나 이외에도 후배 강사와 함께, ‘다문화영어강사를 위한 영어교육지도법’이란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 계기로 나는 다문화센터와 인연을 맺었고, 필리핀 친구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캄보디아인, 심지어 우즈베키스탄 친구들을 만났다.
교육이 끝난 후에도 수시로 보수교육차 이 친구들과의 인연을 쌓았다.
이때 만났던 또 한 분의 인연이 있었는데, 바로 다문화센터장을 역임하는 이교수였다. 사람의 인연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무조건 말한다. 계속 인사하는 것을 잊지말고, 안부를 전하라고.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도 종종 안녕의 메시지로 보내라고 말이다.
내가 그랬다. 전공교수도 아닌데, 다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인연에 감사하다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안부를 전했다.
어느날 이교수로부터 점심을 먹자는 전화를 받았다. 만나보니, 우연히도 같은 지역 성당에 다니고, 내가 좋아하는 몇몇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눌수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꼭 정호승 시인의 봄길에 나오는 봄길 같은 사람이예요.”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라면, 명대사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알려진 <수선화에게>는 알고 있었지만 <봄길>이란 작품은 처음 들었다. 교수님은 시의 1연을 들려주면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구절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딱히 대답할 것을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표현이 내 마음에 쿵하고 떨어져서 요동쳤던 그날이 지금도 생각난다.
얼마 전 어떤 면접에서도 나를 표현해보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이 시를 낭송해주었으니, 분명 이 시가 내 삶의 궤적에 굵은 선을 그은 것은 분명하다.
2002년에 군산으로 귀향했으니 벌써 20여년이 되었다. 남편에게 말하길, 나는 200년정도 산 것 같다고 할 만큼, 이곳에서의 내 삶은 단순히 열심히, 바쁘게 살았다는 것을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 참으로 부지런히, 알차게 살았다. 한여름날, 오진 태양빛 다 머물고 빼곡이 들어찬 옥수수 알들처럼, 이 알들이 수수대에서 저절로 팝콘이 되어 튀어나올 정도로 뜨겁게 살았다.
매일의 일상이 만드는 내 삶에도 역시 수많은 씨줄과 날줄이 엉켜있다. 그중 가장 굳건하면서도 부드럽게 엉켜있는 것은 바로 인생 후배들과 만든 넝쿨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후배들에게 언제나 봄길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자타공인으로 정말 그랬노라고 인정받기도 한다.
2년전 시작한 글쓰기 수업, 에세이반과의 인연 역시 내겐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삶의 전환점이다. 혼자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많은 일들이 글쓰기와 글쓰기 동지들로 인해 첫발을 잘 내딛었다. 한길문고라는 너른터에서 글과 책을 들고 만나는 인연들의 사연은 정말 다채로왔다. 사소한 일상이 모두 대단한 글의 주제가 되는 경험이 새로웠고 큰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어찌 나 혼자만 먹을쏘냐. 가까이 있는 지인들에게 들려주고 참여하기를 수없이 독려했다. 나의 집요함에 지쳐, 아마 내 문자나 전화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 내 선의의 충고를 드디어 받아들인 후배들이 생겼다. 에세이 5기에 신청하면서, 자신들의 첫 작품이 심판대에 올라 귀한 경청의 시간을 기다린다. 불현듯 나의 첫 작품을 제출했을 때의 빨간줄이 떠올라 혼자서 배시시 옷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태생이 그런 길도 있고 사람이 만든 길도 있다. 걸어 다닐 수 없는 길이 없고, 끝이 없는 길이 수없이 많다. 길이 있는 곳마다 사람이 있으니, 길이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길이다. 이 형상 위에 나도 역시 나의 길을 만들어간다. 내가 만든 길은 모습은 없으나 누구나 내 길 위에 들어설 수 있다. 비록 그들과 함께 하기에 좁을지라도 그들에게 꼭 필요한 길 하나를 내어주는데 아낌이 없이 살고 싶다.
에세이 반이라는 길로 들어온 후배들이, 초입에서 만난 나의 길을 밟았으니, 분명히 자신의 길을 잘 만들어 나갈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자기만의 모양을 만들면서 그 길을 탄탄히 다져 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 자신들의 발자국을 보여주며, 내 얘기를 할 것이다. 내 옆에 ‘봄길’보다 더 따뜻하게 스스로 사랑의 길이 되어 걸어가는 언니 하나가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사랑하는 후배들아, 그대들의 글이 책이 되어 서점에서 만나는 날을 고대하며, 더불어 그대들의 소재가 나의 글공부에 보약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