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7
사무실 책상 위, 왠 퍼피(Puppy) 한 마리가 상자 속에 앉아 있었다. 자세히보니, 상자에는 Hush Puppies 라는 로고와 함께 귀품있게 생긴 개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애완견 복실이를 키우고 있다 해도 개 품종을 모르니, 어떤 개가 귀족종인지, 어떤 개가 비 귀족종인지 알지 못한다. 명색이 생명의 평등을 주장하고 품격있게 살고자 하는 내가 살아있는 존재에 차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상자를 열기 전에 무엇인지 알았지만 누가 보냈지 하고 살펴보니 딸의 이름이 써있었다.
아하~~ 어버이날이라고 선물을 보냈구나.
근데, 대뜸 나의 고약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 신발은 꽤 비싼데.”
비싸다는 나의 기준은 1-2만원을 넘어서면 무조건 비싼 것이다. 역시나 가격표가 날카롭게 써있다. 선물을 다르게 해석해 보았다. ‘선물이란 내가 내 돈으로 살 수 없는거’
가족톡에 신발사진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보냈다.
여느 때 같지 않게 아들이 먼저 답장했다. 딸이랑 함께 돈을 모아서 샀다고, 맘에 드냐고 했다. 당연히 맘에 들고 말고. 비싼거라 너희들 용돈 다 말라겠다 했다.
며칠 전 딸이 물어봤다. 엄마는 무슨 색이 좋아? 엄마 하면 무슨 색이 떠올라?
남들이 보기에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다는데, 난 특별히 나를 규정하지 못한다.
무슨 색이 더 좋은지, 무슨 모양이 더 예쁜지.
무슨 음식이 더 맛있는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어떤 신발을 신고 싶은지.
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 아직 여름도 멀었는데, 슬리퍼 신고, 게다가 양말까지 신고 그렇게 다니지마. 무난하게 베이지 색을 골랐는데 맘에 들었음 좋겠다.”
“엄마가 허쉬 퍼피 신발 좋아한다고 얘기했던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 신었던 것 같다. 신발이 가볍고 담백해서 좋아. 무엇보다 오래 신을 수 있어. 고마워.”
두 달 전쯤,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검정색 단화를 1만원에 샀었다. 신는 순간 ‘딱 이거네’했다. 만보걷기 할 때도 열심히 신고 다닌 어느 날, 뭔가 쑥 빠진 느낌이어서 살펴보니, 소위 밑창이 부서져 있었다. 발뒤꿈치를 받쳐줄 밑창이 내려 앉았으니, 당연히 발에 통증이 올 수밖에. 그렇다고 이제 두 달된 신발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밑창만 바꾸려고 차에 싣고 다녔다.
그사이에 여름용 슬리퍼를 신고, 추위를 잘 타니, 양말은 두툼하게 신고 다녔다. 촌닭 패션의 일등자리가 따로 있을쏜가. 신고 다닌 슬리퍼와 양말이 따놓은 당상이었나보다. 딸 역시 엄마의 절약패션을 잘 알고 있는지라, 왠만하면 그냥 넘어갔을텐데, 제 눈에 오죽이나 속상하고 보기 싫었나보다.
며칠 전 아이들도 데려다주고 바람도 쐴겸, 서울 나들이를 했다. 휴게소에 있는 가방 소품들이 진열돼 있어서 가보니, 정가(정말 정가인지는 알 수 없다)의 80퍼센트 할인가로 가방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매고 다니기가 싫어서, 걷기할 때 사용하는 손바닥 만한 작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더니,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 가방을 매일 들고 다닌지 두해가 넘으니 가방 테두리에서 보슬보슬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언젠가 이만한 크기의 가방이나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는데 마침 휴게소의 가방 진열대에 놓여있던 갈색 가방이 눈에 띄였다. 만져보니, 누군가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며 애지중지 한 것 같은 냄새와 부드러움, 앤틱한 겉피부와 모양과 크기가 좋았다. 게다가 가격 끝자리가 9자로 현혹시키는 19000원. 이것을 사고 누가 듣던지 말던지 한참을 떠들었다.
“진짜 좋다. 이 작은 가방에 방이 4칸이나 있네. 딱 엄마 스타일이다. 그치??“
”당신, 잘 샀네. 내가 하나 사줄까 했는데, 당신이 뭐라고 할까봐 미적거렸더만, 잘샀어.“
딸은 정가가 달린 꼬리표에 못내 서운한 눈길을 보내고 남편과 나는 정가를 긋고 그 위에 쓰여진 할인가에 엄청 만족한 눈길을 보냈다.
오늘은 아들딸이 보내준 허쉬퍼피 단화를 신고 작은 갈색 가방을 크로스로 매고 집을 나섰다. 자원봉사거점센터가 있는 모 복지관을 방문하는 날이다. 급여는 없고 자원봉사 시간만 주어지는 거점센터 상담사란 명함을 들고 내 사무실은 어떤 모습일까 찾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 내일 어버이날이라고 과일과 떡 간식을 포장해야 된단다. 명색이 지역사회 자원봉사 상담가인데, 쌓아둔 물건을 두고 나올 수 없어서 습관적으로 포장대열에 합류했다.
350개의 꾸러미를 만든 후, 이제부터 이곳에서 무엇을 할까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원봉사거점센터 역할을 하겠다고 한 내심에는 청소년들과 같이하고 싶은 활동만 생각했는데, 이곳은 노인세상이었다. 봉사자 수혜자, 대상을 모두 바꿔서 새로운 기획서를 작성해야 되나...고민만!
계단을 내려오는데, 햇살이 허쉬퍼피 위로 앉았다. 베이지색이 이제 갓 태어난 여린 강아지 털 만큼이나 부드럽게 보였다. 사진 한장 찍어 남겨야지. 환갑까진 신을 수 있겠지 라며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쓰담거렸다. 오늘따라 쓸쓸한 내 마음도 쓰담거렸다. 힘내라고.
유독 오늘은 낯선 일이 반복되어서 그랬는지 매일 지나가던 도로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익숙치 않은 신발로 자동차의 페발을 밟는 것도 낯설어서 도로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뒤따라 오던 운전자의 고함도 들었다. 아이구, 정신 차려야지...이러다 사고날라^^
어쨌든 새 신발과 새 가방은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자기들에게 빨리 익숙해지라고.
그러나 언젠가 익숙함이 두려울때가 있을 것 같아서 무심코 그들을 바라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