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2.13 정지용 <향수>
책방과 학원을 오고 가는 일상. 오늘 하루만 지나면 며칠이라도 한쪽만 지키면 되겠지요, 설날 연휴로 들어가는 날이라 그런지 결석을 알리는 학생들도 있고요. 친정엄마는 며칠 전 새벽시장에서 샀던 홍어를 잘게 썰어서 홍어 무침 하자고 하시네요. 예전 같지 않게 손도 떨리고 혼자 설 준비하려니 심심하시겠지 싶어서, 냉큼 가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몸이 천근쯤 되는지 무겁고 피곤하긴 해요^^
어제 군산인문학당에서 주최한 ‘김사인과 함께 우리 시 깊이 읽기’ 두 번째 시간 ‘정지용 시인 이야기’ 시간도 잘 마쳤습니다. 행사를 기획하는 것은 쉬우나, 행사가 잘 마무리되기까지는 무수한 마음이 모여져야 합니다. 물질적인 협조, 정신적인 응원, 그 외에 현장에서의 도움 등등... 어제도 그랬습니다. 단순히 강연을 듣기만 해도 될 터인데, 아무래도 저를 위하는 마음과 시인을 대접하는 마음을 모아서 기부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맛있는 찹쌀 콩떡을 준비하신 서 선생님, 꽃과 낭송으로 무대를 채워주신 박 선생님, 먹기 좋게 떡 썰어주신 고선생님, 이리저리 저를 보조하느라 애쓴 김 선생님... 그리고 점심식사값 대신 내어주신 박 선생님까지. 강연장 테두리에 이렇게 고마운 분들이 계시니 김사인 시인의 말씀이 더 빛나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1회 차 김소월시인에 이어, 우리 근대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학적 자취를 남기신 정지용시인. 어제도 3시간에 걸쳐 김사인 시인이 들려준 정지용 시인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의 시 세계는 많은 감동과 놀람이 있었습니다. 저만 해도 정지용의 시 <유리창 1>의 한 구절,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에서 ‘황홀’이라는 두 단어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오늘 시인의 해석을 통해서 가슴에 딱 와닿았습니다. 참고로 여러분께도 김사인 시인의 해석본을 들려드려요.
유리창(琉璃窓) 1 - 정지용(1902~1950)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김사인 시인이 바라본 유리창 1 에서의 ‘황홀’이라는 말의 뜻>
* 유리창은 얼마나 절망적인 투명함이자 차가움인가. 그 앞에 서서 입김을 흐렸다가 닦고, 흐렸다가 또 닦으며 서 있는, 자식을 잃은 자의 고독과 하소연할 길 없는 심사가 실핏줄처럼 섬세하다. 마지막 두 행에 이르러 눌렀던 격정이 터져 나오지만, 시 전체가 견지하는 고요함과 기품은 스물여덟 젊은 아버지의 것으로 믿기 어렵다. 이 시는 역설적으로 슬픔과 아픔의 기막힘을 더 절실하게 보전한다. 둘째 아들을 폐렴으로 잃고 쓴 1930년 1월의 시다.
한 가지, 시 뒷부분 '황홀'의 뜻을 '눈부시고 화려하다'는 요즈음의 의미로만 읽는 것은 부적절할 듯하다. 노자 21장을 연원으로 하는 이 어휘는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흐릿하여 애매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본래의 뉘앙스다. 시경을 강의했던 지용이며, 시의 상황까지 감안한다면 이 풀이를 보태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
이런 공부를 하니, 그 얼마나 즐겁고 통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작년에 군산평생학습관의 프로그램에 ‘근대시인의 시 세계’를 설강하고 문우들과 함께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근대시인들의 시를 접하고 숙고했던 시간 들이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최소한, 낯설거나, 무재미하거나, 그냥 스쳐가는 일은 없으니까요.^^
오늘은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 <향수>를 들려드리며 다음주를 기다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傳說(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