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303

2026.2.15 오세영 <설날>

by 박모니카

차가운 공기 입자들이 모두 부서진 듯, 햇빛도 좋고, 날이 엄청 푸근해졌어요. 책방의 보일러 온도를 낮추었어도 춥지 않고요. 찬물을 만져도 그런대로 시원한 느낌도 들고요. 이렇게 봄이 오나 보다 하고, 계절의 틈새시장에 놓인 감각들을 만져보네요. 하지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는 소리에는 고드름 같은 송곳 소름이 쫘 악 느껴지기도 하니, 이 또한 서러운 일입니다.


어제는 떡국떡과 가래떡을 만든 한 농부님의 부탁으로 ’ 떡 사세요!!’라고 홍보하는 일도 했어요. 얼마 전에는 또 계란을 팔아 달라는 또 다른 농부님의 부탁으로 ‘계란 사세요!!’라고 소리쳤고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요. 뭐 그런 것까지 나서서 팔아주냐고요. 남는 것도 없고 오히려 제 차로 배달까지 하니, 힘들지 않느냐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세상의 이치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게 주어지는 일은 가능한 즐거운 맘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대변하며 홍보해 주고 이익도 챙겨줍니다.

저녁에는 벗의 딸까지 인사 와서, 제가 직접 떡국을 끓여주었지요. 제 아들과 동갑인데요. 얼마나 예쁘게 어른이 되었던지, 미소 지으며 말하는 모습이 참 예뻐서, 꼭 저녁을 먹이고 싶었답니다. 만약에 떡국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즐거운 만남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떡을 팔아달라 말한 분, 소고기를 선물해 준 분이 이 고마울 수밖에요. 잘 산다는 것에는 적절한 때와 만남이 중요한 요소랍니다.^^


설날 인사명단에 시댁의 아주버님(남편의 형)이 있는데요. 어젠 무려 1시간이 넘도록 통화했어요. 간밤 꿈에 그분의 모습이 너무 초췌해서 걱정도 되었고요. 그런데 그분 말씀 중에, ‘우리 제수씨 사는 거 보면 내가 얼마나 반성하는지 몰라요. 책임감 있게 집안을 이끌고 나가고, 지역에서 활동도 본이 되고요. 정말 너무 고맙고, 또 대단해요.’라고 말해서 그냥 웃었답니다. 시댁식구도 한 30년 살다 보니, 친구 같고 동기 같아요. 사실 호적으로 보면 그분이 늦게 신고되어서 저랑 동갑이라나, 어쩐다나? 그러데요....(흠흠) 설날, 추석 같은 이런 명절이라도 있어서 서로 안부 전하고 얘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좋은지 몰라요. 오늘과 내일은 아무리 바빠도 친척과 지인들께 꼭 안부 인사 나누시게요. 오세영시인의 <설날>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설날 – 오세영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여 하이안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의 비어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2.15 봄설날1.jpeg

사진, 안준철시인

2.15봄설날2.jpg 커피한잔 들고 창가로 가니 이런 엽서가 남겨져 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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