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304

2026.2.16 이원규 <밥맛>

by 박모니카

어렸을 적, 설날이면 생각나는 추억 중 ‘특선영화 보기’가 있는데요. 지금이야 눈만 뜨면 볼거리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제 나이만 해도 명절이나 되어야 보았던 특별한 일들이 많았지요. 일단 가정마다 TV가 없어서, 옆집 00이네 가서 보았던 일도 생각나고요. 엄마가 처음으로 샀던 TV도 먼지가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는지, 미닫이 문이 달린 모양이어서 보물상자 같았어요. 진짜 이런 말 하면 ‘라떼는 말이야’에 속한 세대 같아서 맘이 쬐끔 쪼그라 들어도 그 시절이 참 좋았습니다. 하여튼 ‘영화’ 보기를 기다렸던 설날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어젯밤 딸과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어요. ‘왕자 함께 사는 남자(유해진 주연)’가 200만이 넘었다 하길래, 또 사극을 좋아하는 모녀의 밤 외출로 제격이었지요. 그 유명한 수양대군의 조카 단종 폐위 사건이니, 특별한 내용도 없겠지 싶었는데, 감독의 상상력이란 역시 대단한 재능이라 정말 재밌게 슬프게 보았습니다. 진짜, 설 명절에 딱 맞는 영화다 생각했네요. 영화 내용 중 한 줄의 대사가 들려왔는데요. 단종이 마을 청년에게 한문 공부를 도와주는데요. ‘검은 현 누를 황’이라는 천자문도 있지만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 논어 편’이란 말이었지요. 작년에 제 딸도 논어 읽기 줌수업을 했었는데,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명언 한 마디씩 하라 했을 때, 이 문장을 해서 그런지, 어제 영화 대사가 쏙 들려왔다고 하네요.^^ 공부해서 손해 볼일은 없다고 했지요. 하여튼 이 영화 한번 보시면 이번 설날이 오랫동안 기억날지도 몰라요.


오늘은 우리말로 ‘섣달그믐’이지요. ‘그믐’이라는 말이 ‘그믈다(저물다)’라는 뜻이어서 밤새 잠도 안 자고 새날을 기다린다 하는데요. 음력이 낯선 세상에 살지만 ‘진짜 우리의 설날’ 명절이니, 섣달그믐인 오늘 가는 해를 정리하고 설을 준비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싶지요. 저도 친정 엄마 집에 잠시 들러서 부침개라도 도울 일 있는지 보고요. 풍속에는 새벽녘에 닭이 울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새해를 맞기 위해 집안을 환히 밝혀 놓는다는 말을 조카들에게도 들려주면서 꼰대라고 하든지 말든지 ‘고모 때는 말이야...’라는 서두를 꺼내볼까 고민 중이죠.^^


아직도 저는 친정엄마가 진두 하는 상차림이 있어서 명절재미가 쏠쏠하지만, 여러분은 어떠실지. 세대마다, 시절마다, 집안마다 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설날을 준비하고 맞이하니, 여러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군요. 양력설날 1.1일에 이어 다시 한번 새해인사 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특별히 봄날의 산책 편지 독자들께는 더없는 복이 굴러들어 올 거예요.”

어제는 이원규 시인의 시집을 읽었는데요, 이 시 <밥맛>도 공유합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밥맛 – 이원규


지화자, 좋다 몽! 얘들아, 밥 먹자

설날 아침에 대견한 강아지를 부르자

흰 꼬리 부채질에 눈발이 날린다


문득 한 생각이 일어 사료 두 알 먹어봤다

푸석한 것이 어디 혓바닥뿐이랴

무심코 내뱉은 말에도 독이 있고

눈길 손길 마음결에도 악취가 나겠지만

내가 먼저 밥맛을 보고 준 적이 없다

내가 먼저 개처럼 킁킁거리지 못했다


이 땅의 누군가 개밥을 주듯이

나에게 불쑥 찬밥을 내밀 때

어머니처럼 먼저 쉰 맛이라도 보았는지

자꾸 궁금해지는 정월 초하루

네 발의 기억으로 개밥을 먹는다


아무래도 이승의 공짜 밥을 너무 많이 먹었다

2.16섣닫그믐3.JPG

사진, 안준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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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섣달그믐1.jpg 이원규 시인의 시집 <달빛을 깨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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