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26
영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가난이 삼시 세끼 배고픈 신호음처럼 들리던 시절, 이모가 국제결혼을 한다고 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때라, 국제라는 단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이모 결혼식을 보러 서울에 간다면서 집안의 아들이 가야 한다고 4학년이던 남동생과 아버지가 친정 일가 대표로 갔다.
이모의 결혼 후에 처음으로 우리집에 외쿡? 사람인 이모부가 왔다. 동서양 막론하고 사람 눈은 비슷한지, 이모부는 말 그대로 점잖은 사람이었다. 단지, 동양예법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게 하나 있었다. 손위사람인 울 엄마 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뻗고 책을 보는 자세였다. 아버지는 뒷담화로 내게 속삭였다.
“외국 놈들은 쌍놈들이라, 예법을 모른다고.”
나중에 그 얘기를 하니, 모두 배꼽 잡고 웃었고, 처음으로 문화의 차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모부의 직업은 한국에서 병역하는 군의관이었다. 이모는 타이피스트(한국어)로 미군부대에서 일했던, 당시만 해도 키가 172cm인 한국 여자. 누가 봐도 눈에 띈 그런 여자가 몇이나 있었으랴. 본국(미국)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던 아들이 작은 나라 한국의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이다. 용산에 있던 미군 부대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은 지금 봐도 세련스럽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모를 결혼 후 대학원 박사까지 공부시킨 이모부를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어느 날, 이모가 서울로 나를 불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에 갔다. 그중에서도 남산 외인 아파트라는 황홀한 집?을 보았다. 내 외할아버지는 아파트라는 곳은 살곳이 못 되는 성냥갑이나, 닭 장같은 집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겉보기에도 남산을 덮고도 남을 거대함이 느껴졌는데, 출입구부터 경비병들이 있어서 더욱더 기죽은 채로 이모를 따라 올라갔었다.
아파트의 내부는 더 황홀했다. 70년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으로 전국의 초가집이 뒤집어지고 난리인 때에, 아파트 안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요즘 말로 소위 ‘Built In System’이었다. 그 중에서도 건조기가 달린 세탁기와 전기레인지 인덕션은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이모부는 팬 케익을 직접 만들어서 그 위에 달콤한 시럽을 뿌려 주었다. 외국사람을 본 적도 없던 내가 그가 만들어준 음식의 달콤함에 끌려 몇 장을 먹었다. 저녁에는 스테이크를 만들어주셔서 어른들 말을 빌리자면 ‘허천나게’ 먹었다.
결국 저녁에 배탈이 났다. 생전 먹어본 적도 없던 서양음식을 그렇게도 많이 먹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모부가 누구던가. 군의관도 준 의사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걱정하는 이모에게 웃으면서 내 배를 토닥, 이모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모의 한 마디가 정답이었다.
“배부르다고 말을 하지, 멍충하게 그렇게 많이 퍼먹었냐.”
영어로만 말해야 되는 줄 알았던 나의 심정을 이모가 어찌 알까.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이모는 말한다. “그렇게 멍충한 것이 공부는 어떻게 했냐.”
다음날 손님이 왔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소녀였다. 내가 6학년이었으니 그녀는 4학년이었다. 외사촌 큰이모의 막내딸이라고 소개했다. 큰이모는 딸 셋을 모두 대학을 보내고, 유학을 시킨 신여성이었다. 서울의 세검정 골목길을 오를 때면 돌아가신 큰이모 열정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이 이모의 막내딸이 내 인생에 영어라는 언어를 새겨놓았다.
사촌동생은 아파트에 오자마자, 이모부와 영어로 인사를 했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웃으면서!
특히 “으흠? 오~ 예스!, 오케이”등의 말로 이모부와 재미있게 말을 나눴다. 아! 서울 애들은 원래부터 영어를 잘하는구나. 큰이모의 센스있는 감각으로 동생이 입고 온 원피스도 예쁘고, 생긴 것도 왜 그렇게 예쁘게 생겼는지, 게다가 피부는 미국인보다 더 하얗고 뽀얗고.
중1이 되면서 처음으로 영어의 알파벳을 익혔다. 항상 사촌 여동생의 리액션이 생각났다. 나도 빨리 영어를 배워서 이모부랑 얘기도 해야지 라는 욕망도 생겼다. 이모부는 미국으로 가기 전 몇 차례 집에 왔었는데, 성품이 따뜻해서 늘 우리 형제들에게 가까이 왔었다. 그러나 우린 도망가기 바빴다. 오히려 대범했던 울 엄마는 이모한테 물어서 몇가지 영어를 배우더니, 우리들 한테도 가르쳤다. 엄마는 마미, 아빠는 대리(대디-Daddy도 아닌 대리 라고 발음하심)라고 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난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뻔뻔하고 무모해도 좋아. 모르는 것 물어보고, 아는 단어 잘난체 하기”
하지만 영어를 업으로 살고있는 지금도 이렇게 하지 못한다. 머리 속으로 온갖 영문법의 순서, 영단어의 정확성 등을 고민하느라, 말할 때를 놓친다.
난 스스로 수능영어 1등급 후원자라고 말한다. 단, 학생의 의지만 있다면. 그런데 실전 회화에서는 농담과 위트를 섞어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재간이 없다. 반기문, 강경화의 연설문은 귀에 들어오고, 자막은 일시에 독해가 되는데, 외국 유치원 어린이들도 하는 쉽고 가벼운 영어는 귀 기울여 들으며 두려움을 갖는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해마다 버킷리스트에 쓰는 ‘올해의 목표’에 상위 5번째까지의 조항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있다. 바로 ‘영어회화달성법 따라하기’ 올해 초 2월까지, 미국 영화자막 따라하기를 시도했다. 여러 핑계가 있지만, 무엇보다, 무조건 암기법이 싫어서 중단했다. 그럴 바엔 영어책 한권을 읽고 말지 라며 내려놓았다. 오히려 영문장을 필기하며 소리내어 읽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몇 년 전 칠순을 넘긴 이모부가 다녀가셨는데, 군산과 전주의 관광지 몇 군데 돌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드렸다. 하지만 인텔리의 이모부에게 더 멋진 설명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도 말해주고 싶고, 농담으로 이모부를 웃기게도 하고 싶었다. 너무 진지한 내 어투가 싫었다. 이모는 말했다.
“아고, 그 꼬맹이가 이제는 영어를 잘하네~~.”
12살 꼬맹이가 이제는 이모랑 같이 늙어가고 있다.
언젠가 영어직업 현장을 떠날 나이가 될 것이다. 그때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관광 통역사이다. 사람들은 내가 금방이라도 자격증을 딸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잘 안다. 관광통역사란 오로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늦기 전에 지식은 물론이고 재밌게 말을 전하는 법을 배워서 만나는 사람마다 귀한 인연이 되고 싶다. 이제는 디지털 시대 아닌가. 세계 어디서든 누구든지 인연이 되는 시대. 더욱더 영어라는 무기의 진짜 주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