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발소리 듣고 나온 호박

2019.12 엄마와 텃밭이야기 3

by 박모니카


“엄마! 오늘 뭐 하세요? 선물 들고 갈게요.”

열기구풍선처럼 하늘 높이 올라간 내 목소리가 전화수화기를 채웠다. 엄마의 궁금증이 더 커졌던 모양이었다.

남동생이 엄마의 기대감을 대신 전해왔다.

"누나, 무슨 선물인데 엄마 목소리가 아가씨 빰치네요."


올해 텃밭은 엄마가 준 호박모종들이 제 각각 사연을 달고 세상에 나온 호박 천지였다.

다른 종들은 호박얘기에 치어 얼굴도 못 내민 꼴이었다.

특히 같은 밭에 심었던 옥수수와 고구마는 호박줄기의 파죽지세에 눌러 애초부터 그 뿌리도 깊지 못했다.

분명 사랑을 덜 받아서 그랬을것이다. 그것을 한참 후에나 알았다.


140여개나 뿌린 옥수수 씨앗은 당도 크기도 부족한 것들로 20여개만 땄다. 100여개 고구마모종은 두렁 대부분이 멧돼지의 양식장이 되었다. 다행히도 고추결실로 새콤달콤한 장아찌 두 병, 햇빛보다 붉은 고추가루 약간, 밑반찬 양념으로 쓰일 고추댕이를 얻었다. 가지는 들깨에 버물러진 반찬으로, 아이들 먹기좋은 튀김류로 몇 차례 맛을 보았다.


마음 넓은 대감댁 마님의 풍성한 치마 자락을 생각나게 했던 호박어미.

그 속 나왔던 호박씨를 틔워서 모종으로 만들었던 엄마. 5월 어느 날 엄마가 주신 호박모종을 한 아름 안고 텃밭에 일렬로 벼 심기 하듯 심었던 그날부터 호박은 우리 모녀의 깊은 이야기 샘이 되었다.


어미호박의 씨앗을 보관할 때부터 호박이 열리고 따다가 음식으로 나올 때까지 엄마의 이야기 주머니는 완전 개방. 매 순간 내 귀는 들리지 않는 숨소리까지도 잡아낼 마음으로 민감도 최우수 등급의 감청장치가 되었다.

오십이 넘도록 엄마 말을 이렇게 잘 들은 적이 있었을까.


엄마의 시적이고 해학적인 말솜씨를 모아서 월간지에 공모를 하니 감동적인 글로 뽑혔다.

첫 번째 나온 상금으로 엄마랑 오붓하니 둘만의 점심을 먹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 엄마의 자랑도 엄청났다. 그만큼 기대치가 높아진 걸까. 또 다른 월간지 공모 때는 엄마의 말을 빠짐없이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운 좋게도 또 뽑혔다. 상금도 더 받았다. 정말 신기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꿈은 태몽에서나 해석 가능한 줄 알았다. 우리 모녀에게 호박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정정자 여사님께. 당신의 말씀에 행복하고 감사 하나이다. 큰 딸 올림’

손편지와 함께 공모전 상금을 드렸다.

“오메오메. 하하하. 돋보기 끼고 읽어보니 별 말도 없더구만. 돈도 준다냐.”

“엄마, 딸 글을 보고 별거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재밌으니까 뽑아준거지.”

옆에서 듣고 있던 남동생도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 한턱 내세요. 누나에게 계속 용기를 줘야 엄마 특별용돈이 생기겠네요.”

기쁨이 하늘로 승천하니 행복한 웃음은 모두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텃밭이나 가보자. 일년 농사 잘 짓고 뒷마무리도 잘해야 땅도 정성을 알아보고 또 도와준다”

엄마와 텃밭으로 향했다. 가지와 고추를 걷은 자리에 시금치와 봄똥을 심어 놓고 가보질 못했다.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고, 호박과 고구마밭의 시든 줄기들도 거두려는 마음에서였다.


초록으로 대지를 덮고 알록달록 열매들이 만발하여 삶의 궤도에 기쁨을 주었던 지난 시간들.

이제는 찬 이슬빛 머금고 머리 숙여 돌아갈 곳을 찾는 빛바랜 검푸른 줄기들만 가득했다.

기온이 떨어진 탓인지, 심어놓은 작물들도 어리고 더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엄마는 아직도 남은 정이 그리워, 호박밭으로 갔다.

“엄마, 이젠 호박 하나도 없겠네. 있어도 고라니가 먹었을 거예요. 이쪽 두렁의 고구마는 다 난리를 쳐놨어요. 하긴 멧돼지 가족도 먹고 살아야죠”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 때 맞춰 심어놓은 다른 집 작물을 보면서 부러움만 담고 있었다.


“야야, 이것 봐라. 얼굴에 살짝 동상이 걸렸어도 먹을만 안하냐. 서너끼는 충분히 먹겄다”

돌아보니 엄마 손에 호박 세 덩이가 들려 있었다. 기가 막혔다. 아니 아직도 굴러올 복이 남았다니.

어떻게 엄마 눈에는 잘도 보일까. 분명 지난번 둘러봤을 때 내 눈엔 안보였는데.


“서리 내릴 때까지 늦 호박이 열린다고 하더니 맞구나. 이 놈의 주인이 어디 가서 안오나 했겄다. 발소리 듣고 나온 걸 보니”

엄마는 한쪽 줄기를 잡아당기며 누군가에게 계속 얘기했다. 그러더니 호박 두 덩이를 더 땄다.

“엄마 손은 진짜 복 손이네요.”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를 찾았다. 올해 105세. 엄마에게는 시어머니 되신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귀도 눈도 총총하셨다. 말씀도 확고하고 또렷하셨다.

여름을 나신 후 하늘하늘 약해지는 촛불의 여린 심지처럼 점점 누워계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도 우리 모녀의 방문에 힘이 생긴 듯 반기시고 가져간 도너츠와 떡을 한입 드셨다.


백순이 넘은 시어머니와 팔순을 앞둔 며느리의 그 옛날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가슴 한켠에 쏴 한 바람은 무엇일까.

“어머이, 요양보호사 오면 이 호박으로 된장국 끓여달라고 하시오. 어머이 총기가 되살아나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랑 얘기하게.” 엄마는 말 끝을 흐렸고, 나는 눈 끝에 물기를 찍었다.


엄마는 당신 스마트폰으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신호가 울리면 가운데 단추만 누르면 된다고 몇 번을 반복해서 설명하셨다. 두 분의 모습이 너무 정겨워,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사진을 몇 번 찍었다.


돌아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할머니 얼굴 속에 내 아버지의 한없이 인자했던 모습이 겹쳐졌다.

아. 자주자주 만나야 되는데. 엄마도 할머니도. 그 귀한 얘기들을 한 톨도 빠짐없이 가득 담아놔야 하는데.

오늘도 호박 하나로 할머니, 엄마, 나, 삼대를 감싸 안은 이야기 덩쿨이 만개했다.

엄마와호박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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