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할머니 아프시기 전에 빨리 김장하는거 배워. 할머니 곁에 앉아서 하나도 놓치지 말고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하고. 엄마 손에 직접 양념을 묻혀야 할머니 김치를 전수받지. 알았지?”
딸의 지극한 주문을 작년 첫 에세이 <어부마님 울엄마>에 썼었다.
내 딸과 친정엄마의 궁합은 찰떡까지는 아니어도 보기 드물게 세대공감 모델이다. 할머니가 하는 일에는 언제나 나보다 더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애교를 부린다. 당신 딸인 나보다 더 정이 많다고 아무래도 싹싹한 사위 닮았다는 칭찬과 함께 용돈도 듬뿍 주신다.
올해도 내 작은 텃밭에서는 뿌리기만 해도 거둘 정도로 정성에 비해 많은 축복을 받았다. 봄에는 봄똥나물과 쑥, 여름에는 하지감자와 옥수수, 가을에는 고추와 호박. 사시사철 지금까지 식탁에 오른 채소열매들의 수가 무려 20여 가지에 이른다. 지난여름 하지 감자의 풍년으로 지인들과 나누었던 기쁨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자리에 남편과 딸은 배추와 무를 심으면서 겨울 김장을 꿈꿨다.
자고로 김장배추도 찬 서리 두 번 정도는 맞아야 맛있다는 엄마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내 배추는 지난달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서리 발을 두 번이나 맞았다. 주말에 김장날짜를 잡고, 남편과 딸을 대동해서 배추와 무를 뽑았다. 100여 포기의 배추모종을 심었는데 80여 포기를 웃도는 배추를 거두었으니 배추농사도 성공이었다.
코로나학번인 딸이 휴학 중이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특별히 대선후보들의 청년정책과 후보들의 언행의 진실성, 청년 때의 경험에 대한 얘기를 자주한다. 배추를 뽑을 때도 왜 딸이 직접 배추도 뽑고 김장하는 법도 알아두면 좋은지를 말해주니 흔쾌히 내 말에 공감해주었다. 딸 역시도 ‘젊은 시절 경험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 ‘윗 세대들이 전해주는 경험을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는 표현으로 내맘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드디어 친정엄마가 오셨다. 올해부터는 절인 배추 사다가 양념만 해서 먹을려고 했는데, 배추를 심어서 아까운 거 버릴 수도 없다고, 진짜로 올해가 마지막 엄마표 김장이라고 눈을 흘기셨다. 그래도 손녀딸이 심고 거둔 배추니 올해 한 번만 더 김장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또 평생을 먹던 엄마표 김치를 금방 바꿀 수가 있냐며, ‘정말로 올해까지만 엄마가 만들어주고, 내년부터는 누나도 배추는 심지마요.’라는 막내 남동생의 약속까지 있었다.
배추를 반으로 가르는 법, 소금물을 적당히 맞추는 법, 배추 간 절이가 끝나는 시간을 보는 법, 절인배추를 꼼꼼하게 씻어서 소쿠리에 쌓는 법, 액젓과 고춧가루, 찹쌀죽의 비율을 맞추는 법, 함께 들어갈 각종 양념을 썰어 준비하는 법 등 차곡차곡 설명하시고 기억하게 했다.
남동생부부와 딸의 협조로 엄마의 배추 간 절이는 계속되고 나는 주말 수업을 한다고 왔다갔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다고 소리를 들으면서도 ‘언제 이 모습을 담을 수 있으랴’ 하는 맘속의 울림은 점점 그 너비를 넓혀갔다. 일하실 때 내는 엄마의 ‘쉬쉬’소리, 남동생부부의 정겨운 대화소리, 소쿠리에 방사형 모양으로 배추 물이 잘 빠지게 쌓아야 된다는 할머니의 명령에 오케이로 화답하는 딸의 웃음소리.
“할머니, 이 배추들이 내일 아침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요? 물기가 사라지면 배추잎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렇지. 소금간이 부족하면 다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살아나지. 그래도 소금간이 너무 많으면 배추잎이 질겨지니까, 생생한 것이 더 낫다. 살아난 배추잎은 겉절이 담아서 고기랑 먹으면 맛있고. 또 양념으로 버무려 놓으면 숨이 금방 죽는다.”
새벽 5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주말동안 날씨가 매섭다고 했는데 우리집 김장을 도와주는지 새벽 공기도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밤새 잘 삭여진 고추양념 속에 각종 채소거리를 넣고 남동생은 인간 도르레처럼 젓고 또 저으며 땀을 뻘뻘 흘렀다. 유난히도 엄마를 사랑하는 막내 남동생의 도움이 없다면 김장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듯 동그란 김장용 포대를 둘러싸고 앉은 우리들에게 엄마가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배추 속잎을 뜯어 양념과 통깨를 묻혀서 먹여주신 것이다. 평소에는 차갑다는 말을 듣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바로 엄마 음식에 대한 리액션이다.
“으흠~~말로 할 수 없어. 진짜 맛있다. 엄마. 배추도 최고, 양념도 최고 엄마 손맛은 더 최고.”
내 김치와 여동생 김치, 시동생 김치까지 열심히 배추를 양념에 버무려서 담았다. 특히 딸은 제가 심고 담는 배추라고 처음으로 양념도 묻혀보고 통에 따둑따둑 담으며 즐거워했다. 배추김치 16통, 무김치 5통, 겉절이 2통이 나왔다. 훈김이 자르르르한 수육도 등장했다. 탄성 속에 갓 담은 겉절이와 수육을 먹으며 올해도 어부마님 울엄마의 김장탄생을 축하했다.
서윤덕시인이 들려준 <김장> 시를 가족 톡에 올렸다.
가을 햇살아래 토실토실 살찐배추
병아리같은 배추 속이 사랑스럽다
찬바람 불어오는 겨울문턱
가족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봄 여름 가을을 버무린다
계절마다 피웠던 웃음꽃들이 김치 속에 담긴다
“엄마, 나도 겉절이랑 수육가지고 친구들이랑 나눠먹어도 돼? 병아리같은 배추 속 맛을 친구들에게 자랑했지. 나도 김장했다고.”
딸의 애교에 당근이지 라고 말했다.
올해도 내 텃밭은 마지막까지 할 일을 제대로 했다. 재미나게 사는 방법을 일깨워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버무리는 지혜를 주었다. 통깨를 가득 얹은 김장배추잎을 먹으며 웃는 가족에게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웃음꽃을 선물해주었다. 정말 고맙다. 텃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