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며 오랫동안 당신의 배경이 되고싶다
“당신의 발끝이 아직도 따뜻하지가 않네. 흙 이불자락 한치 차이로 생명이 죽고 살고 하지.”
“갑자기 옥수수 심다가 무슨 말이예요? 장화신은 발이 어떻게 따뜻할 수 있어요?”
5년차 텃밭농사꾼을 자처하는 나는 텃밭에 가면 늘 생 초보자다. 오늘도 성당에서 바로 찾아간 옷차림으로 구두에 팔랑바지를 입고 손에 옥수수씨앗만 들고 남편을 재촉했다.
“당신이 빨리 심으면 내가 밥 사줄게. 배고프다”
옥수수를 심으려면 감자밭 옆 고랑도 터야 하고, 잡풀들도 캐야 하고, 옥수수 넣을 구멍도 파야 하는 등 할 일이 가득한데 나는 철부지처럼 그냥 옥수수를 던지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이럴거면 5년차 농사꾼이라고 말이나 말든지... 남편은 그려그려 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해마다 남동생들이 먼저 매형의 생일을 챙겼다. 올해도 어김없이 큰동생이 전화를 해서 매형의 신발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니, 아직도 누나는 매형의 발크기도 모르오? 라며 기가 막혀했다. 정확하게 말해주려고 그러는 거야 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헷갈렸다. 내 손으로 신발 한번 산 적 없으니 빵점짜리 각시다.
얼마전 감자씨로 심은 감자밭을 돌며 남편은 비늘에 숨구멍을 내어주고 있었다. 감자싹이 제법 자라서 비닐을 뚫고 나오려는 싹들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니 공기를 쐬어주라고 했다. 나는 구멍을 뚫다가 싹을 찔러 잘라 먹고 ‘오마나 어떻하지? 이러다 싹을 다 잘라먹겠어. 꼼꼼한 당신이 해야되.’ 만 남발해도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며 결국 남편이 다 했다.
옥수수 심을자리를 고르는 동안 꽃이나 찍고 있으라 해서 얼씨구나 하고 자리를 옮겼다. 벌써 하얀 딸기꽃과 이름모를 노랑이꽃과 나비들이 쪽파와 적상추, 봄똥 사이사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꽃이름 맞추기 퀴즈도 내고, 청푸른 보리싹들의 물결도 보냈다.
“당신 이리와서 옥수수알 심어보소. 씨앗심고 열매거두면 농사는 혼자 다 한거네. 우리 각시가 농사 잘 지었다는 소리나 듣게 씨앗이나 잘 넣어보소.”
씨앗심기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후다닥 뛰어갔다. 남편이 파 주는 구멍마다 옥수수 알 두서개를 넣고 흙을 밟았다. 그렇게 서너번 했을까? 남편이 말했다.
“당신 발끝이 아직 따뜻하지 않네. 농사꾼은 발끝이 따뜻해야 생명을 살리는 법이야. 그냥 밟지 말고 당신 발로 옆의 흙 한자락을 살짝 옮겨서 씨앗에 덮고 밟아주는거네.”
“흙 한자락? 어떻게? 이렇게?”
라며 장화신은 발로 살짝 흙 한줌을 끌어와서 씨앗에 덮었다.
“아하.. 이렇게 하는구나. 씨앗이 더 따뜻해지겠네. 원래 이렇게 했었나? 하긴 작년에도 씨앗 밟기는 당신이 했었지. 이걸두고 발끝이 따뜻하다고 하는거구나. 맞은 말이네.”
손끝이 따뜻하다는 표현은 많이 있어도 발끝이 따뜻하다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 듯해서 새로운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신기하다고 했다. 자신의 말을 서운케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농사꾼의 자질이 있어. 늘그막에 굶어죽진 않겠네 라고 말했다.
남편은 손끝 뿐 아니라 발끝까지도 다 따뜻한 사람이다. 오늘도 팔순의 친정엄마를 제 엄마 보듯이 얼굴을 부비며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연발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딸보다 몇배 천배 낫다고 함박웃음꽃을 피우는 엄마와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내 마음을 사진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엄마보다 더 늙어보이는 남편의 모습이 애처로워서.
속 깊은 아들은 제 아빠가 받은 생일선물을 들고 남편의 어깨를 두르며 병원 문으로 간다.
나는 다시 책방으로 차를 돌렸다. 아침에 남편에게 보낸 가요 한 자락이 떠 올라 쓸쓸히 따라불렀다.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남편의 공기를 느낀다. 늘 나의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올봄에는 책방 돌계단에 피어난 제비꽃을 보고 조동진의 노래 ‘제비꽃’을 들려주곤 했다. 어느날은 흰 제비꽃이 행운의 상징이라고 당신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고 작은 화분에 담아왔다.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도 그 하얀 제비꽃이 나를 반긴다.
사람들은 나의 외형만 보고 무슨일이든 내가 다 알아서 척척 하는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잘하는 것들은 바로 남편의 든든한 배경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어떤이는 말할 것이다. 독립된 자신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언제까지 누군가가 도와줄수 없다고.
그러나 나는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서로에게 받침대가 되어줄 수 있는 우리 둘의 삶의 길이가 길어지길 원한다. 그 지지대의 크기가 거목이든, 한 줌의 흙이든 양이 중요하지 않음을 이젠 안다. 남편에게 느끼는 측은지심이 단지 나만의 심정은 아님을 안다. 나보다 더 나를 위하고 나의 따뜻한 배경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도 따뜻한 발끝으로 나의 씨앗을 흙으로 덮여주고 있음을 안다. 진심으로 당신의 생일을 축하해요. 모니카.
접목(接木) - 복효근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