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21 엄마와 요리 2 (한식문화 공모전)
올해도 변함없이 어부 마님, 울 엄마의 김장은 시작됐다. 자식 오 형제 중 오십을 바라보는 막내가 엄마의 새벽 장에 대령했다. 새벽에 열리는 전통시장의 단골집 배추장사는 엄마의 꼼꼼한 눈에 통과한 배추만이 어부 마님 정여사 댁 김장으로 간택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십 수년을 엄마 혼자서 배추 씻기와 소금 절이기를 하셨는데 2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힘이 드시는지 시장에서 고른 배추 백 여포 기를 장사 집에 다시 맡겨서 소금으로 간 절이기까지만 해주도록 부탁하셨다.
김장철만 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배추 천 삼백 포기를 쌓은 골목길과 엄마의 호령이다. 나이가 오십이 넘은 지금도 새벽 기상이 힘든데 내가 중학시절부터 십여 년의 세월을 이어온 선주집 김장은 이만저만은 행사가 아니었다. 김장 일은 학교를 가지 않는 금요일 늦은 저녁이 기점이었다. 김장 길일을 받을 정도로 선주집 어부 마님으로서 엄마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더불어 비록 어렸어도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막중한 책임감에 합류해야만 했다. 배추 한 포기 자를 힘도 없었던 막내까지도, 새벽에 선잠 깨어 가족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중 1 때 아버지는 선주가 되었다. 그전까지 아버지는 다른 집 배를 타는 뱃사람 중 상급인 선장이었다. 일찍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남의 집 밥을 얻어먹으며 동네의 배 기술을 익힌 후 열여섯 살부터 뱃사람이 되었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일 년 동안 하시는 말씀이 많아야 백 마디나 하실까 할 정도로 조용하셨다.
그런 분이 그 험한 뱃일과 뱃사람들을 다루는 데는 묘한 비법이 있을 거다 라고 생각했다.
선주집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마다 김장 배추의 포기수가 늘어나서 온 식구는 삼일 정도 김장에 동원되었다. 우리 집 배의 명의와 어선 작업은 아버지가 했지만 거친 뱃사람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조종하는 것은 엄마였다. 그 조정 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맛으로 승부를 본 ‘엄마표 김장’이었다. 오죽하면 뱃사람들의 이구동성이 있었을까. ‘군산에서 배를 타고 맛난 밥 먹으려면 김치가 최고인 정여사 댁 배로 가야 혀.’
잘살든 못살든 누구 할 것 없이 김장은 겨울나기 음식의 꽃이었다. 대가족이 사라진 요즘은 4인 가족 중심에 평균 삼십 포기도 많다고 한다. 선주집인 우리 집 김장배추는 평균 천 포기였다. 뱃 사람들과 우리 가족들을 합하면 이십여 명이 넘었고 겨울 서너 달을 지내야 했기에 그 정도는 당연했다. 김장으로 배추만 하는 게 아니라, 무, 파 등 다른 부산물까지 합하면 엄청난 양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해 겨울, 학교를 다녀오니 골목 입구부터 김장배추가 가득했다. 평소보다 많은 양에 몇 포기냐고 물었더니 배추만 천 삼백 포기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깨끔발로 지나가면서 모두 한 마디씩 외쳤다. “오메, 또 늘었네. 네 엄마 배추 씻는 쉬쉬 소리가 더 커지겠다. 언제 끝난다냐.” 그런데 나는 배추 천 포기를 몇 년째 보아서 그랬는지, 삼백 포기 늘어난 양에 대해선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누군데. 아무리 산처럼 높이 쌓인 배추일지라도 울 엄마 손과 소리 한방이면 다 끝나 있을걸요.’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골목길의 또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갈색 고무 통 대 여섯 개가 놓였다. 한 통 당 평균적으로 이백여 개의 배추가 반쪽을 내어 소금에 절여지면서 쌓였다. 천 삼백 포기 배추를 이등분하면 이천 육백 개의 조각이 나오고, 이 통들이 모두 채워졌다. 우리 형제들은 소금기 머금고 반나절 이상을 기다리는 배추통을 보면서 ‘아, 이걸 언제 다 씻냐. 아이고 따뜻한 방에 가서 놀고 싶다’라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이었던 동생들 눈에 이 엄청난 푸른 산이 얼마나 높았을까.
소금에 성질이 다 죽은 배추들을 씻는 과정은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대장정이었다. 초겨울 싸리 한 기운 속에서 고무장갑에 앞치마에 아무리 중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찬 물로 헹굼 의식을 치러야 하는 배추들의 행진을 감당했던 우리들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러나 배추의 씻김굿을 진두지휘하는 엄마의 호령 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한나절의 배추 씻기 과정이 끝나면 이제는 배추들이 기다리는 곳은 바로 소쿠리였다. 제 몸에 가득 찬 물기를 쏙 빼고 말쑥하게 단장이 될 때까지 우리 형제들에게 최고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간식으로 내온 군고구마와 동치미 국물, 그리고 갑오징어 부침개를 먹었다. 나는 발 편히 뻗고 배추 속에 들어갈 파나 양파 껍질을 벗겼다. 엄마는 간식 한 입 받아 드시고 여전히 이일 저일 하느라 바빴다. 고춧가루와 엄마표 액젓의 비율을 당신 손 국자로 재어서 간을 맞춘 뒤 김치 양념장을 만드셨다. 또 그 속에 들어갈, 갖가지 채소들을 썰어 적당량을 바구니마다 채웠다. 지금도 엄마의 양념장 비법은 오로지 엄마 손만이 아는 비율이니 전수되지 못하는 부족한 내 손저울이 야속할 뿐이다.
또 한나절 동안 그 모든 배추들이 20여 개의 독 항아리를 가득 채워 우리 집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느 대감댁 마당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유서 깊은 항아리는 아닐지라도, 십 년 이상 사용된 우리 집 항아리 역시 배추 천 삼백 포기를 기다리며 인내의 발효를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주인장의 김장에 대한 신성한 의식과 그 향연을 기다리며 살아갈 사람들의 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내 우리들의 기도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아버지 배의 모든 어부들이 맛있는 울 엄마의 김치를 먹고 건강하게, 고기도 많이 잡아서 만선으로 돌아오기를. 항아리 한 독씩 비워질 때마다 옥상 위에서 기도하던 엄마의 조용한 울림은 바로 나의 기도문이 되었다.
김장의 대장정이 끝나는 날, 오며 가며 도와준 동네 사람들 손마다 통깨로 버무려진 김치 겉절이가 주어졌다. 우리 형제들은 입맛 다시며 김치 버물린 커다란 통에 쭉 둘러서서 통깨에 푹 담겨 나올 김치 조각을 기다렸다. 엄마가 주시는 배추 한 잎에 때 마침 내리는 하얀 눈송이도 함께 받아먹었다. 아아,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주년 차, 우리 집의 김장 백 포기에는 사라진 것들이 많았다. 김장할 때마다 골목길을 다 물청소해주시던 아버지가 안 계신다. 동네 사람들이 쭉 나와서 구경하던 길목도 사라졌다, 동네에서 유일했던 점방 할아버지가 주시던 콜라와 환타도 없다. 엄마의 통깨 가득한 겉절이를 먹고 싶다던 동네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운 좋게도 변함없이 엄마의 손길이 있다. 그러나 저울 같았던 엄마의 손이 때때로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엄마 이제 김장하지 말고 우리도 사 먹게요.’라고 말하는 우리 형제들에게 아직까지도 엄마는 꿋꿋하게 말씀하신다. “우리 집 배 부릴 때는 천 삼백 포기도 했다. 이까짓 백 포기가 무슨 김장이냐. 게으른 놈들이 눈으로 세상을 살지. 손발로 살아야 잘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