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 엄마와 시인1
2대 독자인 아버지를 만난 엄마는 우리 오형제를 낳았다. 외할아버지 밑에서 뱃일을 배우던 아버지와 결혼하기까지 사연도 그런 사연이 없었다했다. 엄마는 조부모 결혼 7년 만에 얻은 딸로, 소위 양반집 규수처럼 애기 씨 호칭을 받아가며 자랐다. 조실부하고 가난한 울 아버지가 결혼대상자로 결정될 때까지 그 작은 섬 바닥이 얼마나 바다위에서 출렁거렸을까.
나는 섬에서 태어나서 4살까지 외가집에서 자랐다. 2년 전 폐교가 된 식도초등학교의 옆마당은 내 외가집의 뒤뜰이었다. 뒷 담돌 너머, 학교 종이 울리면, 똥지게를 머리위에 지고 멀리 신께 밭으로 가시던 할머니의 뒤를 종종 따라갔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구마 밭에 거름을 주고 돌아오는 길에는 물이 썬 갯가에서 바지락을 캐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엄마는 아버지의 뱃일을 따라 군산으로 나와서 바로 밑 동생을 낳았다. 섬에 있던 나는 섬 집 외가와의 추억을 묻고 섬 소녀가 도시학생으로 자랐다. 그 뒤 엄마는 우리 오형제를 낳으며 아빠의 빈 자리를 메우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체구가 나만 했던 아빠와 뼈대있는 집안을 입증하듯 체격이 컸던 엄마사이에서 우리 형제들은 참 다복하게도 살았다.
내가 중 1때, 아버지가 작은 배의 선주가 된 후로 우리집 안마당은 사람으로 먹거리로 늘 풍요로웠다. 해산물은 상자단위가 기본이었고, 큰 손을 가진 엄마의 음식은 주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엄마는 섬을 떠나와서 배의 선주가 될 때까지의 고생은 영화 백편도 더 만들거라고 말했다. 나를 두고도 ‘한 겨울에 살 집이 없어서 어린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 중 맏이인 네가 천막 가장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해마다 손가락에 동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손가락 동상으로 여러 번 담뱃재 물에 손을 담궜던 기억은 나지만, 천막에서 잤던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는 생선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배를 나가니 당연히 집안에서의 나의 역할에 큰 무게감이 주어졌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는 응당 동생들은 내 말을 부모님의 말처럼 새겨들었다.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은 유독 순하고 말을 잘 들었다. 고집이 셌던 나와 달리 혼을 내면 소 방울만한 눈동자를 굴리며 금방 눈물이 맺혔다. 아침등교 길에도 걸음 빠른 내가 혼자 가면서 빨리빨리 오라고 소리를 쳐도 군소리 한번 없이 따라왔었다. 지금도 동생은 말한다.
“누나! 그때는 참 누나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엄마보다 더 무서웠소.”
그 동생의 복종에서 단호하게 내 팔을 잡으며 반항했던 기로, 고등학생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동생은 남들처럼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해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런데 개인 사업을 하던 중 빚을 지기 시작했고, 더불어 아버지의 배 사업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동생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에 응어리와 없던 미움이 생겼다.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고 탓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중에도 신기하게 내가 조언하는 말은 듣는 척이라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십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이 엄마와 형제들을 찾는 횟수가 줄었다. 또 몇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사이 큰 아들에 대한 엄마의 슬픔과 근심은 갈수록 쌓여갔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재회의 장을 열려 일 년에 몇 차례씩 얼굴을 보게 되었다.
동생이 다녀간 어느 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속 말씀에 눈물이 가득했다.
“예본애비가 다녀갔다. 언제나 밝게 웃으면서 부모를 대할른지. 어릴 적 그렇게도 순하고 이뻤던 자식이 어쩌다 말마다 심이 박혔는지 모르겄다. 결혼 할 때 까지만 해도 배우 노주현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 생기고 넉넉했는디.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를 앞에 두고 늘 어두운 얼굴이니, 아이고, 다 내 죄가 많은가보다.”
엄마의 자식을 향한 애탄을 그냥 들어야만 했다.
어찌 부모의 죄가 많아서 자식이 하는 일이 잘 못 풀린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나와 동생은 그 어떤 형제보다도 부모의 은덕을 가장 많이 받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서 공부 하고 싶은 것만큼 할 수 있었고, 남에게 가난을 보여진 적이 없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삶에 햇볕이 들고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인 것을 동생도 알 것이다’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생도 점차 생활에 여유가 잡히면서 왕래가 잦아졌다. 큰 아들을 향한 엄마의 사랑은 유독스럽게 눈에 띄었다. 오죽하면 바로 곁에서 모시고 사는 막내아들의 된소리를 들을까.
“엄마는 형 발소리만 나도 가슴이 뛰어요? 나도 어쩌다 한번씩 통 크게 엄마 보러 올께요. 항상 옆에 있으니까 존재가치가 없는 것 같네요.”
“오메오메, 그게 뭔소리냐. 다른 놈들 열을 보태도 우리 막내 하나만 못하지.”
엄마는 얼른 불을 끄는 순발력을 보였다.
엄마의 생일아침, 막내동생의 진수성찬을 엄마와 함께 받았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일하랴, 어린 애들 돌보랴 힘들었을텐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엄마의 생일상을 차리는 동생 처가 대견하다. 나이 많은 시누이 티 내지 않으려 해도, 암암리에 표가 나는지, 내 식구에게도 늘 반듯하니 고마울 뿐이다. 손자들과 생일초를 함께 끄고 난 후 아빠 생각에 눈물을 적시던 엄마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오늘도 이렇게 생일상 받게 해주니 모두 고맙다. 너희들 키울 때 징그럽게 고생고생 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것도 다 지나가는 일이더라. 세월이 약이란 말이 맞고 말고. 아침 산천에 피는 꽃도 흔들림 없이 피어나는 꽃이 없단다. 비바람 섞인 애로가 있어야 꽃이 핀다고 안하드냐. 하물며 죄많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애로가 없을 것이냐. 원래 인간은 반 인생은 울고 반인생은 웃는다고 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늘 우애허고, 서로 힘이 되거라.”
엄마의 말씀에 모두 귀만 쫑긋하고 있는데 내가 적막을 깼다.
“엄마, 시인 도종환씨를 알아요? 그 시인이 말한 시랑 똑같네. 들어봐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라고 썼다니까요?”
도종환이 시인이며 교육부 장관도 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검색으로 시 구절을 보여주었다.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 이 사람이 내 말을 따라 썼겄지. 나는 섬 바람 맞으며 크는 꽃들을 보면서 평생을 생각해 온 것이다.” 라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가 시인인 줄 알았더라면 얼른 저작권법 발동시킬 시집 한권 만들어 놓을 것을, 아깝고도 아깝다고 형제들은 박수를 쳤다. 동생들은 나를 쳐다보더니 덧붙였다.
“가방끈 긴 누나가 지금이라도 엄마 말 잘 모아서 시집 한 권 내봐요, 우리들이 시집 만들 자금 담당자 돼 줄께요.”
이게 왠 난감지경인가. 돈 없어서, 글감 없어서 엄마시집 만들지 못한다고 말을 못하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