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8월 말복 다음 날에도 세찬 장맛비가 세상을 덮었다. 46년간 곁에 계셨던 내 아버지의 마지막 긴 호흡은 바람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의 따뜻했던 가슴에서 들려오던 여리디 여린 박동 소리도 멈췄다. 아버지의 세상에서 아버지의 육체적 흔적이 고요해지던 순간 엄마와 우리 오형제는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전 아버지의 10주기 기일 제사상을 엄마와 함께 준비했다. 직장의 휴가기간이 겹쳐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생각하며 엄마와 도란도란 제상을 준비했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커피, 잡채, 말린 홍시, 식혜, 조기, 병치 등,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어, 오형제와 자손들이 모두 모여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이제 초등학생인 손자들은 나의 구령에 맞춰 절을 했다.
“얘들아, 고모가 하나 둘 씩 할 테니까,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으고 절을 하는 거야. 설날 할머니한테 하는 것처럼. 그러나 두 번을 하고 서서 세 번째는 반절만 허리를 숙이는 거야. 알았지?"
“네 고모는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표가 난다. 그런데 고모 말 잘 듣고 해라.”라고 남동생이 덧붙였다.
조카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으니, 제사 때라도 바르게 예법을 가르쳐야 된다고 잔소리 같은 소리를 했다.
엄마표현에 의하면 아버지는 평생 마도로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덜란드어로 외항선의 선장을 나타내는 마도로스는 아버지의 직업을 나타내는 특별용어였다. 엄마는 아버지를 단 한번도 뱃사람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어느 칼럼에서 나온 글에 따르면 근대사회이후 1980년 이전까지 한국 대중가요에서 가장 많이 나온 가사 중에 하나가 마도로스였다고 한다. 무한한 바다를 전진하는 원양어선의 키를 쥔 남자. 세계 곳곳의 대양에서 인간보다 큰 물고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남자. 전시의 승리물을 가지고 당당한 포효와 함께 가정의 따뜻함을 기대하며 돌아오는 남자. 그런 남자들의 대표명사가 마도로스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외항선을 탄 적이 없었다. 섬에서 태어나 당신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남의 집에서 작은 통발 선의 뱃일을 배우면서 저절로 뱃사람이 되었다. 외가집의 뱃일을 하게 되면서 엄마와 인연이 되었다. 섬이라 해도 소위 선주의 귀한 딸과의 결혼은 당시 입 달린 사람이라면 모두 한마디씩은 했다고 엄마가 전했다.
“아구, 저기 정씨 딸래미한테 무슨 인연이여, 사람은 자고로 제 짝을 만나야 되는디.”라고 했었단다.
아마도 엄마는 평생 인연이 된 아버지를 보면서 가요에서 흘러나오던 마도로스의 환상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크는 내내 아버지의 직업을 마도로스라고 적었다.
사람의 인연은 알 수 없는 법,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무려 46년동안 건강하게 해로하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신문을 읽으셨고, 티브뉴스와 토론을 즐겨보았다. 자연과 사람, 건강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제일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전생에 꼭 선비였을 거라고 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말했다. 생각하면 평생교육 시대인 지금 세상에서 아버지가 배우고 싶어 했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 어리석음이 늘 가슴을 때린다. 늘 나 공부하기만 바쁘다고 했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없었다.
워낙 말 수가 없으셨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으셨던 날, 그날은 바로 내가 대학에 합격하여, 대학 입구에 써 있던 장학생명단에 당신 딸의 이름을 본 때였다. 아프셔서 눕기 전 까지도 큰 딸의 그날을 생각하면 행복했다고 하셨다.
얼마나 배움에 대한 한이 있으셨던가. 평생 고기잡이 어부로 사시며 한 자식이라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길 소망 하셨던 아버지.
제사상에 절을 마치고 형제끼리 아버지 얘기로 꽃을 피웠다. 엄마와 형제들은 각자의 가슴 속에 담긴 아버지를 얘기했다. 펼쳐진 아버지의 이미지와 추억의 이야기는 모두 달랐지만 그 조각들을 모아보니 살아생전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내 아버지의 초상이 그려졌다.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나는 아버지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네요. 지금 같으면 얼마든지 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무서운 사람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표현에 인색했는지 몰라요. ”라고 첫째 남동생이 말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를 엄청 사랑하셨나봐요. 나는 아직도 기억나는데, 우리 어릴 때, 아빠 밥 공기에만 계란 후라이를 주었어. 우리는 진짜 젓가락만 쪽쪽 빨았다니까. 아빠가 주려고 해도 엄마가 중간에서 절대 못주게 했었어. 당신 드시우 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계란 후라이가 최고 음식인줄 안다니까.”라고 말하니 모두들 배꼽 잡고 웃었다.
우리들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는 잠자코 계셨다. 눈가에는 그윽하게 눈물이 맺혀졌다. 아무리 자식이래도 부부의 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다음 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여름 녹음은 그 길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파죽지세로 아버지의 집을 덮고 있었다. 올라가는 산길에 있는 잡초들을 한발 한발 촘촘히 밟고 꺾여 눕히니, 그제서야 아버지의 둥근 집이 보였다.
“아빠, 나야. 코로나 핑계대고 너무 오랜만에 왔지. 미안해요.”
나의 들리지 않는 말소리를 아버지는 듣고 계셨다.
“아빠, 다 잘 있지만 특히 엄마 건강만 잘 지켜주세요. 올해도 아버지 올 때 됐다고 한 달 전부터 갖가지 음식 만들고 마음을 모으는 엄마모습, 아버지도 잘 보았지요? 아버지는 정말 엄마 사랑 많이 받으셨으니, 엄마 건강하게 사시도록 도와주세요.”
아버지의 은은한 미소와 함께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들려왔다.
“오냐, 걱정마라. 너도 열심히 살고 이제, 너랑 김서방 건강도 챙기거라.
늘 최선을 다하며 사는 네가 내 딸이다.”
그림,손녀지원
“오냐, 걱정마라. 너도 열심히 살고 이제는 너랑 김서방 건강도 챙겨라. 늘 최선을 다하며 사는 네가 내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