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13 봄날의 산책지기가 꿈꾸는 세상
2022.3
세평책방 <봄날의 산책>지기가 꿈꾸는 세상
사뿐거리며 달려가는 빨강머리 앤의 레이스달린 원피스에게서 초봄 향기가 나왔다. 마침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땅속 생명들이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세우고 텁텁한 흙냄새를 지워줄 것 같았다. 책들의 숨 쉴 공간이 너무 작다고 푸념했더니 그림을 그리는 지인이 책방창문에 동화주인공 앤과 봄꽃을 그려주었다. 단번에 책방에 산소가 들어찬 듯 책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오늘도 말랭이마을 책방 ’봄날의 산책‘으로 향했다. 내가 동네책방지기가 되다니!
코로나 전 가을 지역서점의 에세이반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십여명의 동네 주민들과 함께 시작한 책 읽기와 글쓰기는 오십대 중년인 나에게 신세계였다. 내가 쓴 글이 활자화되어 뉴스기사와 책으로 나오더니 사람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매일 펼쳐지는 책과 글의 매력에 빠져 책을 읽고 매일 글을 쓰고 SNS를 통해 자주 작가들과 소통했다.
코로나 세상 2년동안,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에 물질적 환경은 타박거렸어도 신비의 물을 마신 듯 오히려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다. 글을 잘 쓰고자 하는 갈증은 더 깊어졌다. 시인들의 시와 글쓰기책을 읽고 필사하는 즐거움이 노동의 강도가 될 지경이었다. 어느새 글을 쓴지 2년이 넘고 일 년에 책 한 권씩 써보자는 나와의 약속도 지켰다.
두 번째 출간을 한 2021 가을, 새해를 앞둔 나의 버킷리스트에 굵은 펜으로 한 문장을 썼다.
’새해에는 반드시 동네책방지기가 되자!‘
맘을 정하니 오고 갈 때마다 동네의 상점들이 다르게 보였다.
’저곳에 책방을 꾸민다면 어떨까? 책방크기는 얼마나 되어야 할까? 책방에 어떤 책을 놓을까? 손님들에게는 어떤 책을 추천할까?‘ 꿈꾸는 책방세상의 너비는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시에서 진행하는 예술작가입주공모전을 알았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작가야.‘라며 추천한 지인에게 얼토당토 않다고 핀잔했다.
”왜 작가가 아니예요? 책을 두 권이나 냈으면서. 일년에 한번씩 책 내고 싶다면서요. 책 쓸 공간 있으면 좋잖아요. 일단 공모해봐요.“ 지인의 격한 격려가 힘이 되었다.
정말로 내가 공모전에 합격했다. 면접을 보면서 내 공간에 책방을 열겠다고 했다. 산 말랭이 위에 책방하나 열어서 세상사람들은 올라오고 달빛은 내려와서 책을 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세상에 책방을 하면서 무슨 돈을 벌 수 있겠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어디 세상을 돈과 밥 만으로만 살더냐고, 책을 읽은 양식으로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나는 꼭 책방을 열고 싶다고 대답했다.
합격통보를 받고 다시 찾은 레지던스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돌아오는 고깃배와 살아 날뛰는 생선의 활개 짓이 생생한 벽화집이었다. 세상에 필연이란 말은 분명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십여 개의 입주공간 중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평생을 어부로 사셨던 친정아버지가 타고 다녔던 배와 닮아있었다. 어쩌면 책방을 꿈꾸던 딸의 소망을 하늘에 있는 아버지가 분명히 귀담아 들으셨을거야.
산동네 말랭이 마을에 연 나의 책방은 세 평이다. 처음에는 한숨 한번 쉬니 방안에서 숨소리가 바로 귓전을 때렸다. 한 바퀴 돌아드니 벽에 옷자락이 닿는 듯했다. 이렇게나 좁은 곳에 무슨 책방을 연다고 할까. 그러나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더냐, 원하는 대로 만들어 보는 것이 인생이지‘ 라며 한순간에 마음속 회전문을 돌려놓았다. 눈 앞에 펼쳐진 월명산 등선이 모두 내 정원이 되었다. 세평공간이 우주의 광할한 코스모스가 되었다.
득달같이 생각을 모아 책방의 이름을 정하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책과 꽃을 팔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새해 아침을 새 터에서 맞으면서 떠오르는 일출의 기운이 온전히 나에게로 향하길 소망했다. 겨울 한기를 가르는 일출의 프리즘이 창문을 거쳐 세 평 방 안에 서 있는 나에게 속삭였다. ’잘 될거야. 꿈꾸는 책방지기여!‘
십여년 전 아들이 중학생이 되어서야 방 한칸을 내어줄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벽지를 바른 후 가장 먼저 아들 방에 그림 한 장을 붙였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아들을 칭찬하며 ’책 속에 길이 있으니 책이 있는 방에서 세상을 품어보자‘ 라며 등을 토닥였다. 화가 정선의 그림 ’독서여가(讀書餘暇)‘였다. 책이 가득한 방을 갖고 싶었던 내 어릴 적 꿈을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제 책방 <봄날의 산책>에서 꿈을 꾼다. 책이 숨 쉬는 세평책방에서 나도 숨을 쉰다. 앞마당 화초와 얘기를 나누던 정선처럼 어린 팽나무와 눈길 마주치는 내가 있다. 정선이 들고 있는 부채 한 바람은 나의 펜이 될 것이다. 여름날 누군가에게 시원하고 부드러운 미풍으로 다가갈 글을 쓸 것이다.
봄이 열리는 삼월, 동네책방 <봄날의 산책>도 열었다. 매일 매일 한가지씩 책방을 꾸미는 소소한 행복이 내 마음에 푸른물결을 선사한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온몸이 간지러운 뭇 생명들의 숨소리를 전해주던 이월이 물러가며 다음 만남까지 안녕을 고했다. 벌써부터 매일 아침 사방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안부인사에 책방지기 모니카와 책들이 응대하느라 바쁘다.
봄날 누군가 이곳으로 산책을 나와서 한 장 한 장 읽어보던 책을 산다면...
책방<봄날의 산책>이 꿈꾸는 희망의 세상은 더 이상 꿈의 세상이 아닐거야.
사람이 책을 만드는 세상에서 책이 사람을 만드는 세상, 참 세상이 열릴테니까
<참고, 세번째에세이집을 준비하면서 지난 봄3월에 썼던 글을 다시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