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8시 시간 되는 사람 모이자. 꼭 할 말이 있어. 다섯 중 셋만 모이면 만나는 거다.”
“나는 안 되는데, 시댁 제사야.” “ 나도 안되용. 선약있어요.”
벌써 두 명이 안 된단다. “할 수 없지. 다음에 보자.”
“어, 저는 괜찮아요.” “뭐여~~ 나도 가야지.” 다른 두 명이 된단다.
사무실에서 약속장소까지 걸어갔다. 내일 태풍 오면 만보걷기에 차질이 생길까바, 또 호수공원 걷기와 달리, 도심을 걷는 재미는 어떨까해서 걷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50여분 공원길 걷기와 비슷한데, 만보량은 절반에 그쳤다. 생각해보니, 주범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신호등이었다.
매일 시를 필사하는 후배들과의 만남이었다. 시 필사 이후, 온택트 시대에 맞는 온라인 멤버가 되어 1일 안부 인사가 절로 이루어진 요즘이었다. 그런데 아날로그 감성을 던지지 못하는 나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위 ‘유교 woman’이다. 잠깐의 수다로 워밍업을 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얘들아, 우리도 독립출판이란 걸 한번 해보자. 지금 우리가 매일 쓰는 시 필사를 책으로 만드는 거야. 우리의 감성과 느낌을 담은 글과 함께. 어때?”
“언니, 근데 독립출판이 뭐야? 나는 글도 못써. 언니는 잘 쓰잖아.”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어. 잘 쓰고 못쓰고는 잣대가 없는 것 같아. 지금 우리가 밴드에 올리는 시에 대해 답글을 하잖아. 그 내용을 종이에 활자로 옮기는 거지. 그게 책이야. 그리고 진짜 깜짝 놀랐는데, 답글을 왜 그렇게 잘 쓰는거야. 나야말로 기죽어서 답글 달기가 무서워. 내가 볼 때는 너희들이 시인이야.”
“언니, 근데 책 만드는데 할 일이 많잖아. 그리고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오면 잘 나와야지 사는 사람들이 욕을 안하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
“잘 나와야 좋지. 근데, 잘 나오도록 노력도 안해보고 걱정을 미리하면 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없지. 내가 너보다 열살 많지. 나는 그만큼 마음이 바빠지나바. 남편도 아프고 애들도 어리고. 그래서 뭔가를 시작하면 꼭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것도 큰 병이긴 해. 하지만 너희들도 잘 생각해바. 목표없이 그냥 즐기는 것도 좋지. 이왕이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즐기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 특히 나야말로 혼자 못해. 더 젊은 너희들이 도와주면 잘 할 것 같은데.”
아는 대로 설명했다. 독립출판으로 책 만들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다섯명이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짜는 거라는 것을 설명했다.
유명한 시인들만 시를 쓰고 시평을 하는 데 아니라고 했다. 우리도 시를 읽고 느낀점이 있고, 그걸 평가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이 있다고 했다.
요즘 필사하고 있는 책 중에 김용택 시인의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 갈지도 몰라>와 안도현 시인의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정진아 시인의 <맛있는 시> 등을 읽으며, 나도 이런 류의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할 때 나오는 에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후배들에게 권한 것이다.
두 시간여, 이런저런 사례를 들며 얘기하다보니, 후배들 역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 틈을 타서 또 한번 강조했다.
“생각해바라. 꿈을 꿔바. 우리들의 이름이 새긴 시집이 서점 가판대에 놓여 있는 것을 상상해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지금 이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우리 꼭 해보자. 어때?”
나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상상하는 내 모습이 순수해보였는지, 후배는 사진으로 담아 놔야겠다며, 내 모습을 찍었다.
말하는 나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고, 또 병이 도졌다. 남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밀어부쳐서 힘들게 하는 병, 빼도 박도 못하게 강요하는 병,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 라며 내 맘대로 해석하는 병. 도졌다 도졌어, 내 팔자야.“
후배들은 열심히 듣고 거반 찬성모드로 갔다. 다른 후배들까지 다시 모여서 꼼꼼히 계획을 짜자라고 했다. 일단 추석이나 지나고 하자고 했다.
나는 거의 소리 칠 뻔 했다.
”안돼, 시간이 없어. 추석까지 한 달가량 시간을 소비하자고? 안할거면 몰라도 할거면 빨리 의견 통일. 그 뒤에 할 일이 많아지는거야. 우리도 각자 생업이 있으니 별도의 시간들이 필요하니까.“
내 말에 부드럽게 동의해 준 후배가 참석하지 않은 후배들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이틀 뒤 다시 만나서 꼭 할 말이 있어. 언니가 나와야 될 일이야. 아주 중요해. 나올거지?“ 라고 말하며, 약속을 다시 잡았다. 얼굴도 예쁜 후배도 나의 마음을 읽는 재주도 뛰어나다.
이렇게 우리 5인방 시 필사 팀은 아날로그 만남을 가진다. 아주 오랜만에. 나의 시 필사 100번째 날이 바로 코 앞이다. 우리 5인방의 시 필사가 독립출판이라는 이름으로 서점에 앉아 있을 날도 바로 코 앞이 될 것이다. Well begun is half d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