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303

2023.2.15 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by 박모니카

삼다도(三多島)와 삼무도(三無島)로 유명한 제주도로 오면서 두 가지를 떠올렸죠. 가수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과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열쇠 없는 대문과 삼다도 명물을 한꺼번에 만나면서 오늘 일정에 있을 김정희 추사관 방문을 기대했어요. 사실 제주 선흘리 할머니들의 그림 '할망해방일지’의 작품들을 인터넷으로 볼 때만 해도 ‘대단하시다, 멋지다’ 정도의 수식어로 족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생활 9년. 추사만의 독특한 서체가 완성되고 세한도의 비밀을 담고 있는 제주도라 해도 그가 먼 훗날 후손들의 글과 그림으로 다시 살아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선흘리 할머니(80-90대)들은 평생 처음으로 펜을 잡고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는데, 제 눈에는 모두 추사를 능가하는 예인 같았습니다. 소를 키우던 외양간은 미술관이 되어 할머니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구요, 매일 쓰는 농사도구는 작품전시의 보조창이 되었답니다. 이제는 제주의 관광일번지를 물으신다면 선흘리 할머니들의 생거미술관을 꼭 방문해보시길 강추합니다. 오늘은 정일근 시인의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 정일근


세한도를 그리는 밤 오늘따라 대정바다는 참으로 고요합니다

부인 지난 달 초사흘 가복을 통해 보내주신 서책과 편지를

이달 하순 늦게야 반가이 받아 읽으며 이순 나이에도

천 리 뭍길과 천리 물길 큰 바다를 건너온 그리운 묵향

내음에 그만 울컥 눈물이 솟아올라 한참이나 바다에 나가

망망한 제주바다 끝을 바라보며, 그 끝 너머 지붕과 흰 옷

입은 사람들과 낯익은 길들이 하마 뵐까 돋움 발을 하며

오래오래 서 있었습니다 대저 그리움이란, 불시에 찾아와

대정마을 마른 풀 한 포기 버려져 잠든 돌멩이 하나

남김없이 흔들어 깨워 윙윙윙 울리다가 바다로 달아나는

붙잡을 수도 없는 무형의 저 겨울바람만 같아, 문득문득

지난 날들이 찾아올 때면 참으려 참으려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이제는 오랜 버릇인양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인 오늘 저녁도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먹고 내 배소 앞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날 저물고 샌다한들 내 이름

부르며 찾아올 이 없는 위리안치 이보다 이천 리 밖

더욱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외로울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치와 당을 멀리하고 시와 글씨에 열중하였더라면

뜬구름 같은 한세상 은은한 묵향과 힘찬 시문으로 경영하며,

이렇게 늙어 서로 쓸쓸하고 등 시린 이 나이에 작은 초가

한 칸으로도 넉넉할 것을, 마주 대는 한 뼘 등덜미로도

치운 겨우살이 또한 지극히 따뜻할 것을, 이 밤 늦도록

홀로 먹을 갈아 세한도를 그리며 언뜻언뜻 덮쳐오는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죽음의 아득한 예감들을 애써

떨치며, 뒤돌아보노라면 내 배소 뒤 대밭 사이로 쏴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소리보다 더욱 허허로운 지난 세월들을

하얀 여백으로 비워 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며

살아갈 날들 또한 하얀 여백으로 묵묵히 남겨 둡니다


강희선할망의 외양간 전시관
39년생 고순자 할망의 헛간, 올레미술관에서
오가자할망의 창고미술관
39년생 강희선 할망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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