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h My Life

여름을 거두고 가을을 심다

2020.10.3 김장거리 배추 무우를 심으며

by 박모니카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로 자란 작물들 -옥수수, 감자 -을 거두고 나니 그 자리에 찬 바람이 숭숭거렸다. 다 키워 좋은 자식이 집을 떠나버린 것처럼 내 마음도 시렸다. 갑자기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자식 키울 때는 어서어서 크거라. 아프지만 말고. 그 자식들을 다 키워 놓고 보니 지가 잘 나서 큰 것처럼 굴더라."


하지만 사람에 비하면 자연이 준 선물들은 그저 복종하기만 하니 오히려 혜택을 받는 나는 미안했다.


심지 깊게 뿌리 내린 옥수수대를 혼자 힘으로는 뽑을 수 없어서 그냥 놔둔지 며칠째, 텃밭 지인 에스더님 짝꿍이 이밭저밭 다니며 잡풀도 없애주고, 내 옥수수뿌리도 말끔히 뽑아주었다. 다시 또 새봄이 온 것 처럼 마음에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을에 심을 작물들을 생각했다. 당연히 1등 후보자는 배추와 무우였다.작년에 에스더님 김장 김치를 하도 맛있게 먹어서 올해는 나도 꼭 배추를 심고 김장까지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매년 김장을 해주시는 엄마께 미리 말씀을 드렸었다.


장마가 유독 길었던 탓에 욕심많게 심었던 고추들은 빨간색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탄저병으로 수몰당했다. 이것도 경험이려니 생각하려해도 너무도 아깝고 나의 어리석은 무지에 머리를 쿵쿵대며 열 댓번은 자책했다.


다른 지인들의 고추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고추대를 다 뽑자고 하니, 남편은 그냥 두면 늦고추라도 먹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의 흐름 속에 '숙살의 기운'이란 것이 있다고, 저절로 병충해가 사라질 것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뽑지 않고 남겨둔 고추대는 찬바람이 가져온 숙살의 기운을 받아 스스로 치유되었는지, 요즘에는 풋고추따는 재미도 솔솔했다. 비록 빨간 고추를 잔뜩 따서 고추가루를 만들려던 나의 꿈은 사라졌지만.


지인들의 밭은 어느새 푸른 배추모들로 채워졌다. 뜨끔해서 어느날 새벽장터로 향했다. 배추씨를 뿌려서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배추모 120개 한판을 샀다. 무우와 갓은 씨로 준비했다. 배추모종을 살 때는 몰랐는데 막상 심다보니 그 양이 엄청 났다.


'요것들이 다 자란다면 배추 120포기가 되는거 아닌가.'


엄마의 김장경력은 배추 1300포기도 끄덕없었지만 나이드셔서 그런지 3년전부터는 배추도 간절임 한 것을 가져다가 양념버물기만 하신다. 밭에 심는 배추는 내가 일일히 뽑아서 소금 간치기까지 해서 드려야 할판이었다.


"아고야 모르겄다. 일단 심어야 배추가 나오든 고추가 나오든 할거 아닌감."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남편은 웃기만 했다.


감자와 옥수수를 걷어낸 밭 두 두렁을 채우니 90여 포기, 아랫밭을 골라서 다시 나머지를 심었다. 무우씨와 갓 2종 씨를 나란히 뿌리고, 지인이 준 대파종 50여개를 심었다. 심은 끝은 알 수 없으나 이미 3년째 작물 심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큰 힘 들이지 않고 즐겁게 심었다. 사실 심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라주는 작물들 앞에서 키우는 노고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얻는 결실로 나누는 기쁨에 행복이란게 이렇게 가까이 있구나를 생각한다.


지인들이 내게 묻는 질문 중에

"도데체 선생님은 언제 그 많은 일을 하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늘 비슷하다. 나의 '언제'는 남들과 같은 24시간 속에 있고, 나의 '힘듬'은 늘 내가 좋아서 스스로 하는 자율성과 능동성에 있다고. 한가지를 덧 붙이자면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소통 수단을 나름 열심히 배워서 이용하는 부지런함.

이것이 추가되면 모자라는 시간도 없고, 근심이 될 어려움도 크게 없다.


며칠에 한번씩, 점심 후 산보삼아 텃밭에 가봤다. 나보다 2주일정도 빨리 심은 가경이네 배추는 무럭무럭 속이 꽉꽉 차올라왔다. 원산지가 우리나라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체구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가경이 아빠의 정성과 부지런함이 비료가 되니 가히 천연비료 중의 으뜸이다.

'가경이네는 좋겠다. 올 김장 푸지겄네. 아부떨어서 꼭 맛있는 김치 얻어먹어야지.'


오른쪽을 돌아보니, 보라빗 비트와 잎이 신비롭게 나풀거렸다. 코알라네 비트는 주인의 칼칼하고 다부진 성정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 듯했다. 조선무우의 장고한 세월을 딛고 일어나 맞갖은 음식재료로 상에 올라와서 특이한 맛으로 승부를 본 음식재료가 되었다. 엄마만 해도 동치미를 담을 때 종종 비트를 넣어서 신비로운 빛의 국물이 우러나도록 일조하는 친한 벗이 되었다. 다가가서 비트 날개죽지 한번 쓰다듬고 돌아섰다.


왼쪽에는 에스더네 밭의 작물들이 부끄럼타고 얌전한 새색시의 모습처럼 정갈하기 그지없다. 소리 없이 오며가며 돌보는 주인장의 심성처럼 자라는 작물들도 제 할 일에 소리없이 잘도 자란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에스더 부부하고 맛난 밥 한끼 먹어야 될텐데 라고 남편한테 말했더니, 언제든지 좋지요 라고 답했다. 지난번 우리 옥수수와 감자밭의 잡풀을 모두 뽑아준 답례를 꼭 해야 될텐데...


텃밭의 왕고참 대준씨 가족이 이제는 텃밭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쁜 각시가 더 재밌는 일을 시작했다고, 각시 하는 일을 도울 예정이란다. 가장 아쉬운 사람은 바로 나다. 눈치코치 없이 이것저것 물어봐도 속 깊게 잘도 알려주었는데...


예고없이 떠난 대준씨에게 서운해서 대준씨가 심어놓은 대파를 모조리 내가 다 먹어야지 하는 심통을 드러냈다. "당신이 다 먹어. 대준씨도 뭐라고 안할걸. 내가 술 한잔 사주면 되지."라고 남편이 말했다.


들어오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크다고 하더니만, 항상 터줏대감자리에 있던 대준씨가 안보이니 마음이 쓸쓸했다. 그래도 밴드동아리에서 탈퇴하기 싫다고 해서 다행스러웠다.


오늘도 두툼한 가을바람을 타고 밭에 갔다. 배추포기가 얼마나 차고 있는지, 못해도 2등분 할 만큼은 나와야 한다고해서 물도 주고 눈길도 주고 왔다. 곁을 지키는 고추대에서 싱싱한 고추 십여개를 따면서 된장국 맛을 볼 남편의 얼굴도 생각했다. 올해는 병원 신세를 안지고 밭 작물을 살피느라 수고한 남편의 얼굴을.


분주히 바쁜 일상으로 11월을 채우면 배추속도 다 채워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엄마의 김장 비법과 솜씨, 그리고 김장동안 쏟아내실 어록을 다 기록해놔야겠다.


"내가 언제까지나 니네들 밥 챙겨줄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겄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는 마음만 있지 밥 한끼도 챙겨주지 못할 것이 슬프다." 라고 했던 엄마 말씀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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